국가주의가 도적인가, 영웅주의가 도적인가?

바다를건너다2016.08.06 08:05조회 수 41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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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주의가 도적인가, 영웅주의가 도적인가?

-反싸드파의 ‘무정부 공산주의’적 민족 신학 비판-


가. 국가 획일주의 對 反국가획일주의


40대 중후반 이상으로 어렸을 때 反共교육을 들었고, 20대에 민주화운동 절정기를 보낸 중년들은 거의 비슷한 감정을 가질 것이다. 어렸을 때의 국정교육은 불가피한 획일주의였지만, 지금은 벗어날 수 있는데도 다른 방식의 획일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계몽주의가 의존한 神化에 의존해 있으며, 한국적 계몽주의는 다시 그 신화로 복귀될 수밖에 없다고,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의 논리의 한국적 적용으로 논리화시킨 바 있다.


40대 중후반 이상세대가 유년 시절에 대한민국의 정당화에 반대되는 기제는 제도권에 살아남지 못했다. 대개, 그 정당화기제는 비슷했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의 특정 부분을 인용하고(헤겔 철학을 이해하는 게 결코 아니다), 국가에 협력하는 것이 自由라고 반복교육 받았다. 그러면서, 대칭점으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의 조국은 없다’는 문구를 걸면서, 그러한 자유는 용납할 수 없다고 계몽됐었다.  그런 반공교육의 계기에는 6.25 전쟁 때, 국군 영역이 아니게 될 때 사유재산권이 일체 보호되지 않았던 상처와 연관이 있다.


 

세계사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국가를 형성한 민족뿐이다. 왜냐하면 국가만이 자유, 즉 절대적인 궁극목적의 실현이라고 하는 것, 국가는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것이 가지는 모든 가치, 모든 정신적 현실성을 오직 국가에 의해서만 가진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적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이성적인 것이 각지자(覺知者)로서의 인간의 대상으로 되고, 그것이 인간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존재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인간은 의식이고, 이러한 의미에서만 인간은 풍습 안에서 살고, 법률적·인륜적인 국가생활 안에서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다운 것은 보편적 의지와 주관적 의지의 통일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것은 국가 안에 있어서는 법률 안에, 보편적이며 이성적인 각종의 시설(여러 규정)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지상에 현존하는 신(神)적 이념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국가는 세계사 전반이 한층 구체적으로 된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국가에 있어서 비로소 자유는 그의 객관성을 획득하며, 또 이 객관성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법률은 정신의 객관성이고 참다운 의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률에 복종하는 의지만이 자유이다. 그것은 그 의지가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그 점에서 의지는 자기 자신의 곁에 있으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국가·조국이 생존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고 인간의 주관적 의지가 법률에 복종하게 되면, 자유와 필연의 대립은 없어진다. 이성적인 것은 실체적인 것으로서 필연적이지만, 이 이성적인 것을 법률로서 시인하고, 이것을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실체로 보고 이것에 따라간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들은 자유이다. 여기에 객관적 의지와 주관적 의지는 융화되어 오직 하나의 흐름이 있는 전체로 된다. 왜냐하면 국가의 인륜이란 개개인의 주관적인 신념이 통할 수 있는 도덕적인 그것, 반성적인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관적 신념은 오히려 근대 세계의 것이다. 이에 반해서 참다운 고대 인륜의 근저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의무를 지킨다는 점에 있다.(100쪽, 헤겔, 김종호 역, 『역사철학강의』, 삼성출판사, 1995.)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정확히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연합권력이 한국정치를 휘어잡은 이후에는 제도권에는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기제는 살아남지 못했다.


국가주의 획일주의는 反국가주의 획일주의로 바뀌었다. 장년층 보수는 반대할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하고, 대학가 물밑에서 문화를 바꾸는 시도에 당했다. 그런 일을 주도한 민주화 연합권력의 정점에는 『사상계』를 주도한 함석헌이 놓여 있다. 『사상계』는 60-70년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評이 있을 만큼, 오늘의 한국 사회 원로 엘리트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펼쳤다.


함석헌 저작집 속에서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구절은 대충 꼽아도 상당히 많다.


<함석헌 저작집 1권, 2009년 252-253, 이하 권수와 쪽수만 표기)> <1권 254-255쪽>,  <2권, 174쪽, 108쪽, 138쪽, 215쪽,  268쪽, 136쪽>, <4권, 221-224쪽, 325쪽, 162쪽>, <9권, 305쪽, 310쪽> <13권, 266쪽>, <5권, 136-137쪽>, <12권, 314-315쪽, 20-21쪽, 46-47쪽, 69-70쪽>, <21권, 46-47쪽, 127쪽>


국가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는 이렇다. ㉠ ‘국가지상주의’가 폭력주의이며, 국가지상주의 때문에 희생 받았고, (일제 말기를 체험한 엘리트 독자를 겨냥한 표현이며), ㉡ 국가지장주의는 옛날 시대이고,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주의이고(新종교로 세계를 읽는 객관성 결여), ㉢ 국가가 전체를 가장하여 속이며, 조직적인 악이 국가이고(유교를 비판하는 도교의 시점), ㉣ 국가주의가 없다면 유물주의도 없을 것(반공교육을 조롱하는 시점)이라는 내용을 갖는다. 현실로서는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반공권력 전체를 부정하는 지향의식으로 보여진다. (국가안보는 군대에 기반을 둔 반공권력에만 있고, 대학가 엘리트는 反共을 반대하는 反국가주의에 장악된 것이다.)


한마디로 논리의 가장 중심에는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 巫的  조화자가 있으며, 그런 영웅 앞에 대중의 순응성을 전제로 한다. 영웅(함석헌 저작집은 ‘지식인’으로 표현)과 마을 주민의 연합고리를 깨는 모든 것은 폭력이며, 그 영웅의 주권의 무제한적 구현만이 평화라는 주장이다. 즉, 반공국가는 유교적 동일성이란 측면으로, 도교적 조화주의를 구현하는 것을 막으면 폭력이란 말이다. 그러나, 도교적 조화주의가 역시 그러한 세계관을 동의하지 않는 씨족에게 폭력이 됨을 숨겨 왔다.


國家중심의 정당화를 취하는 권위적 억압기구를 통한 의견통일이 ‘독재’와 ‘폭력’과 ‘획일주의’라면, 조선시대 붕당 정쟁에서 족벌 세도정치의 붕당 연합 마피아 전략을 활용한 의견통일은 ‘독재’와 ‘폭력’과 ‘획일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유교적 주객 동일성만 상징폭력이고, 도교적 주객 동일성은 상징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나 한가? 아울러, 新종교 안에 내장된 무교 환상 세계속의 조화는 추종하는 농민의 머리 안에만 있는 것이고, 실제적 상태가 아니다. 그런 환상만 주입하면, 고도로 획일적인 지식의 선별 상태는 조화적 상태인양 말해질 수 있을까? ‘환상’으로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음주’ 상태로 쩔어 사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조화는 실제 상황에서 일반 국민의 모든 시점에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나. 한국 근대 속에 개입된 呪術 이성의 기원 = 사회진화론


民族의 번역어는 nation(국가, 국민, 민족 모두의 번역어)도 되지만, 단지 같은 핏줄 만을 의미하는 차원의  ethnic 도 있다. 한국사에서 民族은 고종황제 관련 忠君愛國담론을 대체하고 들어섰다. 다시 말해서, ‘님군(임금)을 섬긴다’는 사유체계와 民族이 공존하며 존재했다는 말이다. 임금은 ‘씨족 神’이다. 국민들의 합의와 동의 이전에 형성되는 핏줄을 연결하는 상징적 가치를 갖는다. 한국사에서 民族에서 ‘핏줄 민족’의 의미가 상당히 존재했다. 이는 독립운동 과정이 유교적 멘탈리티가 지배적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왕조가 붕괴되고 일제 식민지가 됐다. 존재하는 國家는 부정의 대상이다. 특히, 한반도를 떠나서 만주 지역에 정착한 이들에겐, 뒤도 안돌아보고 부정할 수 있는 신분이다. 주어진 현실 국가를 부정하는 데 道敎가 생활적 신앙이 된다. 단군 민족이란 핏줄적 동일성만 유지되는 한에서, 만주지역 한인들에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민족혁명선언’을 보면, 얼마나 만주 한인들의 시점에 종속해 있는가를 느끼게 된다. 한반도를 떠날 수 없고, 개량주의적으로나마 한반도에서 계속 삶을 영유해야 했던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나, 단재 신채호는 일괄적으로 친일세력으로 단정하며 처단할 세력으로 평가한다. 만주지역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혈연 연고주의 공동체의식이 깊이 담겨 있다. 그의 가치관은 곧 그의 단점이기도 하다. 모든 국민이 주인인 자유민주체제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무제한적 긍정은, 단재 선생 사고관 따른 분열과 씨족 전쟁의 영구화를 몰고 온다.


반면에,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는 유교 세계관을 타고 왔다. 일본 제국주의 체제는 물질 재화 배분이 매우 불공정하고 편향적이었다. 맹자의 정전제․균전제 유토피아를 통해서 모두 같이 못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게, 당시 한국 엘리트가 사고 가능한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유교적 이상향을 구현하는 道敎的(巫敎的) 조화 구현자로서 엘리트가, 농민들에 비춰진 사회주의자의 모습이다.


한국 공산주의는 서구지식이 주술적으로 한국민족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존재했다. (좌파 지식에서 한국 공산주의는 유교로 이해한 마르크스주의 이단이란 평가라든가, 아니면 민족주의로 이해한 소련공산주의이며 공산주의 자체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많다.) 그런 가치는 사회진화론이 채웠다. 남로당 권력자 박헌영 조차도 식민지시대에 공산주의 이해는 유물론이 아니라, 사회진화론의 연장으로서 공산주의로 이해했다.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에 의해서 아시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서구의 지식을 수용하여 서구 강국과 경쟁하여 이겨야 한다는 아시아인의 자각의식을 담고 있다. 논자마다 다양하게 펼쳐지나, 결론은 한결같은 데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의 연고공동체의 주관적 만족을 위한 역사발전 지향이란 것이다. 즉, 칼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 및 잉여가치설을 둘러싼 상품관계로서 ‘M-C-M’분석 대신, 한국 민족 신앙으로 이해한 사회 변혁 기대에 덧 씌워진 마르크스주의를 믿었다는 말이다.


 

개화 계몽 세력의 사회진화론

애국계몽 세력의 사회진화론

서구화(민족의 서구 지향성)

민족의 독립지향성

역사발전 =이면 ‘배경집단’의 주관적 만족을 지향하는 주술적 발전

 

다. 종족적 자아 무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나?


들뢰즈․과타리 이론을 수입한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한국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를 사는 국민들의 심성에 ‘오이디푸스’적 자아형성 단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안티 오이디푸스』이론을 원색적으로 적용하면 한국 사회에 들어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한국 사회에서 예외적인 파렴치범을 빼놓고서는, 모친에 아들이 성욕을 느끼거나 부친에 딸이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


종족적 자아는 사람의 무의식에 言語를 통해 각인된다. 그 각인되는 방식은 ‘음성’과 ‘문자행위’ 모두에 해당된다. (문맹 농민을 교육하는 音聲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문맹 농민들의 종족적 재생산의 과정은 설명할 길이 없다.)


서구 가정에 오이디푸스에 해당하는 것은, 한국 가정에는 ‘大同’신화다. 어느 가정이든 오순도순 씨족간 원만한 이상을 말한다. 그 과정에는 儒佛仙 이 공유돼 있다. 종족적 자아는 종교정치를 통해서 형성된다. 씨족 사회의 관습이 종교정치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한국을 넘어서 동아시아 사람들의 주체성은 모두 ‘연고적 주체’이며 ‘개인’보다 ‘공동체’가 강조된다.

 

大道가 행해지면 천하에는 公義가 구현된다. 현자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수여하며 신의화목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인으로 하여금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하며 장년은 일할 여건이 보장되고 어린이는 길러주는 사람이 있으며,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홀아비를 돌보는 병든 자도 모두 부양받는다. 남자는 남자의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할 일이 있다. 재화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사적으로) 저장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노동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남을 해치려는) 음모가 생기지도 않고 도전이나 의적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바깥 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이런 상태를 대동이라고 한다.

지금 大道가 숨고 천하는 (개인의) 家가 되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고 자기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며, 재화와 노동을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한다. 大人이 그 지위를 세습하는 것을 禮라 하고 성곽의 해자로 요새를 만들며 禮義를 기강으로 삼아 군신의 관계를 바로잡는다. 부자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형제를 화목시키며 부부를 화합시키고, 田里를 세우며,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를 현명하다고 하며, 자기를 위하여 공을 이룬다. 그러므로 음모가 생기고 병란이 발생한다. 禹․湯․文․武․成王․周公은 이 때문에 뽑힌 사람들이다. 이 6군자들은 모두 성실하게 예를 따른 사람들이다. 그 義를 밝히고 信을 입증하였으며, 과실도 밝히고 仁을 본받으며, 사양하는 것을 가르쳐 백성에게 常則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따르지 않는자가 있으면, 권세가 있는 자도 제거 되었고, 백성들은 그것을 재앙으로 여겼다. 이런 상태를 소강이라고 한다.(진정염, 123쪽)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性卽理 지향성에서 心卽理 지향성으로 바뀌었다. 양반 가문 씨족 관습을 가늠하는 것을 온전히 이어받는 것을 性으로 보는(天命之謂性) 차원에서, 씨족관습만으로 도배되는 자아 영역에 주체적이며 직관적인 느낌을 포함하는 것이다. ‘四書’보다는 ‘五經’이 그러한 직관적 느낌에 걸맞은 사고재료를 제공했다.


구한말 시작돼 일제 시대 독립운동에 주체세력이 된 新종교는 양명학이 시대상황에 맞춰 변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 즉, 『中庸』에서 시의 적절함을 뜻하는 요소로서 中이, 他종교 및 일반 민중계급까지 확장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유교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겐, 이러한 변조는 상당히 부정적인 왜곡을 범한 것이겠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유교의 대중화로서 新종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에겐, 유교 근본주의가 그냥 무대뽀 똥고집으로 비춰질 수 있다.


종족적 자아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분제 속에서 더 나아지거나 편안한 위치로 편입되는 욕망 기제로 존재한다. 조선후기는 성리학 중심의 왕권제로 통제했어도, 민간사회에서 엘리트는 도교 및 불교와 조화관계로서 유교를 보는 인식이 존재헀다.


거울단계에서 양반들에게 大他者는 ‘가문’이다. 반면에, 일반 민중에게 大他者는 마을이다. 가문의 이름이란 큰 목소리에 양반들은 주눅든다. 반면에, 일반 민중은 마을 공동체란 큰 목소리에 그러하다. 원초적으로 억압되는 것은 종족적 자아에게, 性이 아니라 私的 요구다. (일본문학에 私소설이란 게 존재한다. 서구 문화에선 있기 어려운 문학 분과 설명이다.)


양반계급은 ‘四書五經’을 주야로 묵상하며 일을 하지 않는 삶을 종사하면서 지배계급 (양반계급) 무의식인 상징계로 편입되며, 민중계급은 그런 양반에 붙어서 종사하는 사람이 되면서 민중계급의 상징계로 편입된다. 비생산적인 유교 경전 읽기만을 몰두하는 자신을 거울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신분의식을 하면서 양반계급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신분을 깨닫는다. 반면에, 양반계급에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그 양반계급을 떠날 수 없는 자기를 인식하며, 민중계급은 자신의 신분을 깨닫는다. 프로이트 심리학을 교조적으로 적용하여, 한국인에 性의식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인 무의식에 그러한 역할은 ‘신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한국인의 정서로 말해지는 恨은 편집증이 일반화된 공간에서 병적 심리인 조울증의 한 양상으로 생각되며, 서구 사회처럼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심리로 말해질 수는 없다고 본다.


계급 주체의 재생산은 한국종교에서 같은 용어라 하더라도, 계급과 신분에 따라서 다르게 작용한다. 유교용어를 대표하는 天命과 仁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天命

양반계급 

민중계급 

상징계 

유가적 진실

납득할 권력

상상계 

‘하늘’의 명령

신비한 세계

실재계

사후 정당화

勝者의 자기 미화

그런가보다 

(판단 X)

 

 

양반계급 

민중계급 

상징계 

군자됨의 의미

人情

상상계 

경전 속 성인의 예

미담 전설

실재계

부패와 人情사이

그런 것을 해달라

(仁은 남의 이야기)

 


동일한 유교의 용어도 다른 신분과 주체를 생산했다. 결국, 종족적 자아의 최종 귀결은 혈연 연고 집단간의 私的 윤리로 연결되는 수직적 관계다. “논어” 등이 철저하게 실리 문제를 小人(피지배계급)으로 전제하는 반면, 실생활에서 민중계급은 도덕문제를 철저하게 ‘잘난 사람’(지배계급)의 영역으로 전제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구인들의 自然法에는 십계명 같은 계약과 약속 안에서 사람들이 연합하는 기제가 흔하지만,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사람들의 自然法에는 해당지역의 통치권을 임금으로부터 인정 받은 귀족들에게, 자신들이 곧 天임을 인정받기 위한 가혹행위가 많았다.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주리를 틀라! 예이~~!!> <이리 오너라!!!> 史劇에서 표한 흔했던 대사는 결코 가벼운 진실을 담은게 아니었다. 양반계급은 사소한 경우에서도 자기 중심의 사회 지배로 신분성을 확인하려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지배함으로서 존재의식을 확인하는 게 한국의 양반계급이었다.


(순수하게 착하디 착한 대학생들은, 아시아 사회가 안 좋다면서 순수한 서구 이론을 구사하여 민중계급을 대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면 민중계급은 대체로 -- 100 이면 100으로-- ‘호구 청년’ 이라는 듯 비하하는 가치의 윽박지르기를 한다. 그렇게 당한 청년은 곧 30년 전의 그렇고 그런 권위적 어른으로 늙어간다.


甲乙 관계 청산은 甲乙 관계라는 말만 쓰지 않는다고 된다고? 혹은, 귀족층만 두들긴다고 된다고? 어처구니 없고, 어이없는 ‘나이브’한 세상인식!! )


그 속에서 공공을 위한 윤리 담론은 설 자리가 매우 협소해진다.


이러한 측면을 개혁하는 차원에서 등장한 新종교의 대표는 ‘천도교’다. 천도교의 대표적 상징어는 ‘後天開闢’과 ‘吾心卽汝心’으로 볼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정치 이데올로기에 상당히 반복적이고 잦은 빈도로 新종교 정치용어가, 관련 배경층의 동원 기제로 사용돼 왔다. (이젠, 非-新종교인들은, 新종교 마피아들에게 인권 박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을 알고, 대항해야 한다. ) 모든 씨족 종교가 그러하듯, 자신들의 씨족 연고 관계 집단이 宇宙의 중심이길 소망한다. 씨족 종교 취향이 보존된 모든 종교단체는 곧 대한민국의 중심이고, 모든 교육기관은 대한민국의 중심이 됐다. 반면에, 정신분석학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이성적 분석은 그런 중심성을 해체한다.


‘후천개벽’ 이란 용어는 정신개벽에 의해서 민중이 거듭날 때 지상천국이 구현된다는 천도교 유토피아다. 상징계는 천도교인(혹은 新종교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결정적인 경계선일 것이다. 儒佛仙을 신종교 지향적으로 섞어서 볼 때, 후천개벽이 종교의 상징어구로 다가온다. 상상계는 그야말로 민중계급의 모든 희망사항을 덧 씌운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실재계로서는 종교지도자 말 잘 따르면 좋은 세상 온다는 차원의 복종 기제가 된다. 유교의 대동세상이 그러했고, 기독교의 종말론도 에수 안 믿는 사람에겐 비슷하게 다가온다. 종말은 끝없이 지연되고 그것을 이용하는 세속의 정치권력의 정당화기제로 쓰여진다는 말이다.


‘오심즉여심’이란 천도교용어는 후천개벽 직전단계에서 성취될 천도교 유토피아의 한 상황을 말한다. 상징단계에서도 역시 신종교인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선이 된다. 농민종교로서 新종교 멘탈리티를 이해해야, 이 표현을 이해한다. 상상계는 역시 농민들의 갖가지 희망사항을 폭포수처럼 덧 씌운다. 그러나, 실재계는 종족주의로 인해서 가정을 넘어서는 불통자체도 영원할 것이란 이야기다.


천도교인 무의식이 실재계에 포함된 영역은, 천도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불신할 때 여겨지는 폭이라며 반대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러 종교가 섞여 사는 사회이기에, 이런 차원은 당연히 인정돼야 한다.


한국종교는 종족적 자아를 재생산한다. 한국종교는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한 농업중심의 마을을 이룬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다. 한국인 무의식을 형성하는 제일 큰 틀은 ‘원시유교’와 ‘원시도교’라고 본다. (대종교인은 ‘원시도교’가 우위라고 볼 것이고, 대종교 코드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원시유교’가 될 것이다. 종교중립적으로는 어느 것이 우위에 있나는 큰 의미가 없다.)


1) (원시) 유교


한국인에게 天 신앙이 있었다. 天신앙은 군주권 정당화와 자연숭배가 겹쳐졌다. 天신앙을 받는 개인의 주체에는 ‘性’으로 맺어진다. 性은 하위 단계로 仁義禮智가치와 연결된다. 그리고, 性과 짝을 이루는 自然은 天理 문제로 설정된다. 天을 바라보는 인간의 性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天理가 마을 관습을 담고 있다면 종족 보존만의 가치를 갖고 있고, 天理가 마을관습을 넘어섰다면 주관적 느낌 중심의 양명학 가치라 설명된다.


2)  (원시) 도교


유교가 天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면, 도교는 自然과 더불어 움직이는 道에 초점이 있다. 道의 구현자는 異人이나 眞人으로 설명된다. 그런 사람들 중심으로 마을의 경계가 주어진다. 도교는 民은 자연의 일부로 보면서, 里人과 眞人(=道)은 天으로부터 보는 경향이 있다.  (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


유교 귀족 신분이 현실을 부정하게 되면 道敎에 심취하게 된다. 노자 65장, 74장, 3장에서 드러나듯이, 도교는 결코 일반 민중을 주체로 상정한 것이 아니다. 도교는 노자의 小國寡民으로 상징되는 춘추전국 시대 현실 부정이 핵심에 깔려 있다. 글의 서두에서도 제시했듯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체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함석헌이 의존했던 믿음이기도 했다. 도교는 중국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귀족 신분이 살아가기 힘들 때 위로가 되는 믿음이었을 뿐이다.


(자유민주 헌법 수호세력에게는 함석헌 믿음을 계승하여 도교적 현실부정으로 대한민국 제헌질서를 부정하는 것까지는 이를 수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그러나, 함석헌이 그러한 현실 부정에 빠지게 되는 부분으로, 무엇이 이승만 체제와 박정희 체제에 존재했는가 문제는 따져볼 가치가 있다. )



3)  대승불교


한국에 수입된 불교는 중국 불교다. 王중심의 종합지향성을 갖는다. 인도불교처럼 空중심의 신분제 정당화를 하는 차원이 아니다. 원효 대사의 一心은 유교의 大同신화와 무난히 겹친다. 원효 대사의 대승불교를 계승한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유교 변법자강 사상가인 양계초가 상당히 많이 인용돼 있다. 원효 대사의 대승기신론의 원융사상에는 장자의 제물론 영향이 보이기도 한다.


 

  *. ‘토착화 신학’이라 불리는 기독교 신앙이 있다. ‘천도교의 기독교화’로 민중신학 세력이 말하는 믿음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성경적 세계관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일 때 부르는 신앙이다. 그 요소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기독교 신앙으로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토착화신학에서 예수는 古소설의 英雄과 겹쳐진다. 삼위일체신학은 토착화신학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신학을 어떻게 쓰든지 씨족종교 안에 존재하는 신분제는 해체된다. 토착화신학은 고소설상의 영웅 코드를 활용한다. 예수신앙은 天으로부터 설명하고, 民衆은 노자적 道로 설명한다. 단, 노자적 道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민중신학의 규약 안에서, 기독교처럼 보이는 외형을 가질 뿐이다.

삼위일체 신학이 아니라, 천인합일 도식의 씨족 종교에 강제로 해석한 기독교가 온전한 기독교인지 반드시 논해야 한다.

 

씨족 종교로서 연고적 자아는 天人合一이란 종교 코드 속에 포개어진다. 씨족적 자아는 天을 바라보는 씨족적 자아 개인을 말한다. 씨족적 자아는 天과 自然을 동시에 보면서 초월적 가치를 세상적 가치로부터 분리하여 높이보는 히브리적 가치를 가지지 않지만(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자아의식), 궁극적으로는 씨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주관적 감정의 홀로 말하기를 추구한다. 한국 엘리트들은 결코 경쟁적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자기가 神이기 때문이다. 한국 엘리트들은 경쟁적 상황이 되면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한국 神話를 연구하면 이러한 정서를 알 수 있다.


한국의 씨족적 자아는 ‘反외세’(우리 마을/딴 마을)가 ‘反봉건’(귀족 타파)을 압도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마을을 지배하는 귀족 신분의 장악상태가 강했다.



라. 종족적 자아와 한국식 좌우합작의 비극


‘이승만 기념사업회’는 2003년 이후 한국사 좌경화에 대항하여 ‘임시정부 정통론’을 버리고, 3·1운동으로 돌아가자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직후에 3·1운동의 한국사 평가가 달라졌다. ‘이승만 기념사업회’는 기독교중심으로 해석된 3.1운동 역사 해석이 고정불변의 보편성 있는 지식으로 생각한 것이다. 역사해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본인은 변하는 가치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종족적 자아가 최고 권력을 중심으로 다원주의를 취할 때, 『書經』의 皇極蕩平 논리를 취한다. 즉,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해서 군신과 상하가 특정한 당파에 편중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건숭 서울시의 ‘I SEOUL U’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서, 서울시 운영주체(君主)를 중심으로 左右에 사람들(臣下들)를 거느리는 모습의 상징이 됐다.


1920년대 좌우합작이 바로 이러한 방식이었다. 지도자간의 합의만 있었고, 국민간의 소통성 증진은 전혀 없었다. 물론, 마을의 변절지주(친일파)가 있는 공간의 일반인(이런 사람들이 무슨 罪인가?)의 몰이해도 존재했다. 1920년대에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합작은 끝없는 충돌을 유발했다. 특히, ‘신간회 해산’을 둘러싸고 소련의 지원자금에 낚인 사회주의자와, 민족세력간의 사고차이도 계속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敵이 존재했을 때는, 그러한 모순을 일본 제국주의로 넘기면 그만이었다.

 

大同신화로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의 희망을 세우고, 그 대척점에 檀君이라는 최초의 임금을 세운다. 그리고, 현실에 부재하며(고종 운지 이후에 현실 임금은 없으니) 상상 속에 존재하는, 한국사 속에서 최초의 임금인 檀君을 정점으로 “I SEOUL U”식의 좌우합작을 벌린다.


좌우합작 마을은 중도파 마을로 말해지기도 하며, 중도파 마을은 ‘두목주의’믿음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해진다. 1987년 이후 중도정치세력은 강력한 ‘보스’중심의 정치체제로 존재했다.


정말, 진짜 문제는 이런 좌우합작 마을의 ‘종족적 자아’가 연고주의를 담고 있으며, 무수한 파벌로 분해될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의견 통일이 이루어진 순간은 결정적 순간 뿐이다. 그 순간만 제외하면 巫的 무질서가 평균 상태가 된다.


종족적 자아를 유지한 좌우균형은 엘리트간의 담합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지, 민간 상호간의 소통능력의 증진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담합은 巫的 조화주의로 민간에 정당화된다. 남북연석회의로 방북하는 김구와 김규식을 바라보는 지지층의 믿음이기도 했다.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소련에 놀아난 바보같은 행위로, 그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에게는 비극적이며 영웅적인 행위로 기억된다.



마. 20년대 좌우합작운동의 계속된 연장전 : 민주화 이후 통일운동 담론

       -통일운동 담론인 듯, 통일운동 아님-


민주화 이후 통일운동은 헌법에 기재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평화적 통일이라기보다는 反共 國家를 도교적으로 부정하거나, 무교적 조화로서 통일을 지향하는 관점이다. 국민에 ‘유불선’을 공유하는 신화로서 ‘大同’신화를 주입하며, 그에 기반한 人情으로서 사회참여의식을 끌어낸다. 그래서, 권력을 연고정치에서 맺어지는 특정인으로 몰아가는 장치다.


20년대 좌우합작이 지도자간의 합의만이고 내부 구성원간의 소통윤리 기제가 전혀 없었듯이, 민주화이후 통일운동도 마찬가지였다. ‘大同’신화를 통해서 사람을 불러모으는 기제를 극단화하기 위한, 巫敎的 呪術로서 정치와 경제민주화를 논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화 이후 통일운동담론을 추진하는 핵심세력은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와 김규식에 기대를 가졌던 세력으로 보여진다. 해방직후의 관습이 세대전승을 통해서 씨족적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통일운동 담론은 도교적 이분법이 지배한다. 칼빈주의 이분법이 진실로서의 이상향과 현실의 이분법으로, 진실로서의 이상향이 늘 이긴다. 이런 이분법에서는 진실로서의 이상향이 이긴다. 반면에, 도교적 이분법은 불만으로서의 현실과, 이상으로서 현실이 대립한다. 도교적 이분법은 불만으로서의 현실이 늘 붕괴한다. 통일운동은 무교적 조화를 추진하는 영매로서 현실정치인을 담는다. 그 정치인을 통해서, 갖가지 비 논리적인 모순관계를 자기 앞에 병렬 시키는 기복적 주술이 요구된다.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과 공산주의의 북한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파벌 보스 정치인을 巫敎 제사장으로서 조화주의 지점에 포지션 시켜야 한다.


 

무너져야 할 세속 세계

개선돼야 할 지상천국 세계

자본주의

경제민주화

냉전

탈냉전 

분단 

탈분단

 

고상하게 말해서 ‘巫敎 조화주의’지, 정치인을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시점으로 우상화시킨다는는 것이다. 이렇게 巫敎를 통일담론에 적용하는 댓가는 대단히 컸다. 경제는 시장에 화폐의 양적 증가만을 위한 呪術的 시각이 판을 쳤다. 法에 있어서는 따르고 싶은 법만 따르는 일이 빈발했다. 아예, 입법 단계부터 보편타당성을 현저하게 결여한 특정 정치지지층만을 배타적으로 빨아주는 법이 생겼다. 이런 입법은 국회의원이 ‘정치무당’으로 지지층에 감성적으로 포지셔닝되니까 빚어지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국민이나 大衆으로서의 자아에는 문명 파괴 속성이 있다. 巫敎는 恨풀이라느 이름하에 그러한 속성을 대단히 급진화한다. 그리고, 巫敎는 민족신앙이란 이름하에 이성적 시각을 전부 물리친다. 말이 먹히면 비판자를 親日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그래서, 오직 정치 지지층의 감정적 배설감을 특정 정치 연고층에 연결하는 일이 많아졌다. 巫敎의 감정적 배설감이 국민 대중의 중심이 되자, ‘애국’과 ‘반역’의 경계선은 사라진다. 자신에게 ‘굿’을 관람했을 때 ‘떡’을 주느냐 안 주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서로 다른 체제를 극복하는 시민주체를 생산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체제 모순을 귀찮아 하여 결론만을 정치인에 요구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씨족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소통능력의 증진이 아니라, 상위 정치인이 자신을 뻥 뚫리게 하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해주느냐 아니냐의 ‘통함’이 절대화가 되는 일이 빈발했다. 政治가 잘못 나가면 시민사회가 잡아줘야 하는데, 솔직한 말로 시민사회가 이런 점이 더 심하다. (‘시민사회’-라 불리는 단체-가 시민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新종교 안의 무교주의의 실천적 적용의 사례로 봐야 한다. 백낙청에게 남북체제 극복은 헤겔의 止揚(aufheben)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헤겔변증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백낙청이 믿는 신앙인 원불교의 원융사상에 가깝다. 즉, 남북 체제극복을 一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백낙청의 분단체제극복은 원융사상의 一心에 상응하는 王權이 글의 裏面에는 깔려 있다. 그것이 백낙청의 표현으로는 남북체제연합(고려연방제 주권)이다.


국민이 정치인을 천지 창조에 가깝게 <巫敎 조화주의 창조자>로 믿게 되면, 국민은 더 이상 건국 질서를 계승하고 승계할 사고관을 가지지 않게 된다. 무교는 大衆이 원하는데로 자신의 뜻을 찾아나서는 신앙이기에, 준법 정신 및 제헌 질서 계승은 자동적으로 파괴된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신앙에는 이런 무교 코드가 급진화되는 일이 빈발했다.


巫的 조화주의로 보는 관점은 무당 제사장의 독재주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존재한다. 노무현 정부 때 남북연합 단계에서, 태극기 조차도 대한민국 땅에서 마음대로 들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믿음은 남북연합에서 이뤄진 연합권력이 무당 제사장의 독재주의로서 조화주의를 구현한다는 속에서 존재했다.


(이제까지는 이런 점을 모두 ‘종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 좌파가 그런 행동을 하는데에 떡밥이 될 수 있는, 동일한 코드의 무교적 정치를 하면서 좌파가 세력을 모으기 좋게 문화를 좌파로 도배한 공간에서, 좌파의 염장지르기를 극단화하는 것을 유발했다.


6.15와 10.4는 종북이기 이전에, 신종교 안의 무교적 조화주의 신앙으로서 농민이 넋놓고, 엘리트에 종속적인 상태의 농민종교 믿음을 전제한다. 이 자체가 과연 자유민주 신앙으로서 메인 가치가 되는 것이 타당한 건지가 논의돼야 한다.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에서 북한의 대남 태도는 묻지 말고, 오직 한국 정치만 무당적인 조화주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요구와, 그 요구 확산을 위한 매스미디어에 신종교 상징어구 도배질은 심각하게 봐야 한다. 또, 강성 반북만 하면 된다는 조건으로 보수 사회조차도 新종교의 무교적 조화주의 논거가 도배질 상태에 이르렀다.)


무교적 조화주의로 보스 정치인을 씨족 神처럼 우상화하는 공간에서, 시민사회간의 ‘신의성실’원칙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 오직, 정치인이 무교적 조화주의로 정치를 바라보는 대중에 ‘감정차원’의 ‘케겔’ 운동을 어떻게 해주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시민사회간의 횡적 진실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씨족(종족)신앙 특유의 수직 질서만 남는다. 횡적 언어는 특정인이 독점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포장언어에 가깝게 된다.


민주화 이후의 통일운동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통일이라 불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보수 사회에서 논해지는 표현도 법치중심의 표현이 아니라 ‘경계를 초월하는 도교적 일탈’감정으로서의 自由통일이다. 보수사회에서 자유민주통일이란 표현 대신 자유통일을 쓸 때, 거의 대부분 新종교 안의 무교 감정을 중심에 넣는다는 논리와 연결된다. 이는 단언컨대, 헌법의 통일관점이 아니다. 법치주의 현실문명을 부정하는 종교를 기반하는 통일관점은, 자유민주 통일일 수 없다.


민주화 이후 통일담론은 20년대 좌우합작 담론에서, 48년 남북연석회의 이후 건국 반대운동, 그리고 그 이후에 민주화 이후에 다시금 그 믿음을 복원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통일운동인 것 같지만, 사실상 그 담론의 배경이 되는 특정한 씨족 연고 집단 공동체의 이기주의일뿐이다.



바. 사실상의 엘리트의 연합독재에 의한 ‘국헌문란’상태

           -어째서, 공론화가 되고 있지 않나?-


예전의 보수 사회에서는 ‘단일 민족담론’이 유행했었다. 反共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血族’이 논의 된 것이다. 反共血族‘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서, 反共권력은 공산세력을 오랑캐로 보는 시각을 국민에 동의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홉스 『리바이어던』 이론에 의해서 국민에 양여받은 권력과 단일민족 담론을 통해서, 국가는 반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자체 성격으로는 法家的 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보수 민주화 노선은 시민사회의 협력과 동의에 기반한 국가로 개조되길 소망했다. 국가에서 진리는 혈연·지연·학연 등 연고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란 20대들의 확신이 힘을 발휘했다. 서구 사회는 사법(민법)이 먼저 생기고, 공법(국가법)이 나중에 생겼다. 건전한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된 기반하에서 國家가 형성됐다. 한국은 공법(국가법)이 먼저 생기고, 私法이 나중에 생겼다. 건전한 시민계급은 당시에도 형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형성되지 않았다. 한국은 국가가 어떻게 사소한 것까지 규제하는가 하는 점을 양산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민간이 양반귀족등의 후손에 얼마나 기울어진 공간인가 하는 은폐된 문제와 같다.

 

국가주의 1

국가주의 2

영웅주의 

유교(법가)적 권력 집중주의

시민사회 협력의 결과

대중의 감정을 매수, 포획한 정치인이 국가다.

 


분명한 사실은 민주화 이후 法家的 국가주의 대신 민주화 세력이 실천하겠다고 하는 국가관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87년부터 일정기간 시도하는 척만 했지, 실질적 추진 의사는 없어 보인다.


노무현 정부 때 귀국한 외국 엘리트들은 한국에 건전한 시민계급이 늘 존재해 왔으며, 정부가 악의적으로 좌경인사의 인권을 박해한 것처럼 논의했다. 이는 민주화 인사의 희생을 한국 민담 신화의 영웅 공식에 집어넣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과 초청된 서구 인사 문제를 반영한다.


현실은 시민사회의 합의와 동의가 중심이었어야 할 사회는 과거보다 더 없어졌다. ‘작은 정부’는 엘리트(민주화 영웅)가 자기 마음대로 할 때, 아무것도 제지할 수 없는 수준을 말한다. 조선후기 허수아비 임금 기반으로 세도정치가 벌어졌던 상황의 재탕을 하려는 의도처럼 보여진다. (한국사를 모르는 서구인사는 이런 감각을 모른다.) 현재도 그런 차원으로 국민의 불만이 폭증하는데, 연일 민주화 인사는 ‘대통령 힘빼기 가능’ , ‘대통령 힘빼기=민주화 선진국’ 타령을 한다. 민간은 학연·혈연·지연의 인질이 됐다. 그리고, 민간에 금전지원은 공론장의 왜곡화를 가져다 줬다. 강한 마피아 상태인데도 민주화 인사가 있는 영역은 서구 시민사회인 것처럼 脫규제 상황을 누리고, 그보다 훨씬 마피아 상태가 약하거나 없는 상황에도 민주화인사가 없으면 민주화 권력의 강력한 규제 상황에 처하고 있다. 강력한 보수 이념을 구사하는 정권이 아니라는 불만을 현실을 보지 못한 장님이다. 민주화 이후에는 그러할 권력이 창출될 기회가 처음부터 배제되도록 먼저 손을 써온 역사다.


무당의 제사는 무당의 강력한 주권안에서 빚어진다. 무당은 그 어떠한 사회 논리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자기 앞에 감정적 위로 상태로 일회적으로 배치하고 말 뿐이다. 그런 상황을 마치 헌법적인 ‘평화’와 ‘화해’인양 민주팔이 세력은 국민을 향해서, 전문적으로 ‘뻥’을 장기간 쳐 왔다. 巫的 화해는 무당주권 강화에 청중의 위로 감정의 극단화이고, 이러한 논리는 한국 민주팔이 정치인의 권력 강화를 기반하는 종교정치로 이어졌다. (신문에는 신종교를 알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종교 교리의 떡칠 상황을 본다. 잘 알려지지 않았음을 악용한 것이다. 불교 교리와 기독교 교리는 잘 알려졌기에 규제 상황이다.)


反共은 뚜렷한 역사적 기원이 있다. 해방공간에서 6.25 전쟁 사이의 빨치산 및 공산세력의 폭거에 대한 전 국민적 공포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응향기 사건’과 ‘북한 토지개혁’ 및 ‘6.25 전쟁 북한군 점령지의 만행’은 빠짐없이 논의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反共은 해당 연고집단의 기복주의적 감정 위로로 변질됐다. 반공은 멸공에서 반공으로, 더 나아가 勝共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勝共에서 평화신학의 논의에 까지 이른다.


 

 민주화 이전의 反共

민주화 이후 反共

- 공산주의적 폭거 (양민 학살·재산강탈·종교 자유침해)로부터 자유

- 국민의 의무와 권리 이행 = 전원 참여

- 反共연고관계자의 감정적 배설행위

- 좌파의 부르주아 반동 타령 정치공세의 180도 거꾸로 세우기

 


反共이 민주화 이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확장하는데 쓰였다. 공산당의 만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국민이 참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반면, 민주화 이후에는 反共은 무교적 배설감정으로 특정 연고집단의 이기주의가 쓰였다. 그런 무교적 배설감정은 특정 연고집단의 엘리트의 권력집중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反共이념이 기반한 뚜렷한 역사적 기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조갑제기자의 황당한 이념 개작이 빚은 비극일 것이다. 정말로 특정 연고 집단의 이기적 배설감이 反共의 전부이거나 그렇게 보여진다면, 反共은 반공을 믿는 장년층의 대중 고립만이 반복될 것이다.


도교적 무정부주의 코드와 연결되는 씨족 神으로서 영웅 권력 집중 구조는 법치주의의 궤멸을 가져왔다. 좌익진영은 처음부터 법치 감정이 없었고, 우익사회에도 反共의 이념 개작으로 인해서 法治가 뿌리에서 붕괴되는 상황에 처했다. 입법 과정부터가 특정 연고집단이 과잉 반영되는 우덜주의에 침식된다. (최근 5.18 법 개정이 그 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은 준법은 안하려 한다. 입법 과정부터 준법 과정까지, 전부 즉흥적 감정이 전부가 되며 보편타당성을 향한 상호적 문제는 사라져 버린다.


사. 싸드 반대파의 이데올로기 : 무정부 공산주의 민족 神學


싸드 반대파의 이념은 90년 이전 근대화 중심의 국정 교과서 한국사의 사대주의 담론으로 설명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親中’은 중화주의로서 小중화상태로 받드는 차원이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 관련 중국 지역 민족해방(공산)운동의 동지적 관계의 계승문제가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 서방세계의 질서와 북한공산집단을 접한 한국의 정상적 안보기능에 대한 도교적(무교적) 부정과, 무교적 조화자로서 자신들이 믿는 정치인(김대중→노무현→문재인)에 권력 집중을 보였다. 시진핑 중국 공산당은 ‘화해 사회’를 구현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국토균형 발전을 연상시킨다. 중국 공산당이 무교적 조화주의 추진자라고 무당제사장의 권력집중을 파고 드는 것이다. 親中은 그렇게 싸드 반대파 민족해방주의와 관련된 농민종교 내부의 문제로 봐야 한다.


 

무교적 조화주의 = 무교제사장 절대주의 = 한국 좌파 보스 정치 절대주의 = 중국 공산당 절대주의

→ 국민의 자아의식 붕괴 (국민의식의 미디어에 사물화) + 외국의 속음 (민중신학이 서독교회 믿음과 동지적 관계인양 오인한 몰트만은 WCC사에 길이 남을 ‘호구’짓) + 학연·지연·혈연에 인질된 미디어

 


 

전통적 반공 우익 시각

무정부 공산주의 민족 신학

종북. 친북.

(전통적 반공이 형성된 박정희~전두환 때는 反무교. 그러나, 김영삼 이후 보수주도권자들은 신종교인이면서, 반공의 관습을 계승하니 모순 발생)

남북한의 무교조화주의 믿음은 가능하다.

= 한반도= 마음(대승불교)

  한반도의 전지적 작가시점 (기독교)

  충성할 대상도 모르는 중용(유교)

 남로당 + 지하혁명당의 선동에 농민이 놀아남.

만물을 조화시키는 도교적 異人, 眞人은 가능하며, 그런 인물의 조화행위를 통한 북한측과 연대일 뿐

 


농민종교인 新종교는 본래 유교 양명학계보에서 나왔기에 反외세(오랑캐 배척) 심리가 있다. 그런 유교체제에서 주입된 무의식을 활용하면서, 싸드배치로 인한 농사꾼의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좌익진영은 (1) 민중신학(무정부 공산주의 민족 신학)만 아는 사람, (2) 마르크스주의만 아는 사람 (3) 둘 다 아는 사람으로 나뉘는 데, 기존의 전통적 반공우익 시각은 新종교는 전부 우익이란 가정하에, 좌익은 마르크스주의만의 선동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민중신학(신종교)만 알고, 마르크스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좌파 군중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보수진영을 취한 ‘보수 신종교’인들의 ‘이기주의’가 현실분석의 적절성을 막아왔다고 생각된다.


경제민주화는 좌파 정치의 呪術 모드다. 英雄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농민층의 믿음을 깔고 있다. 최저임금 상승 문제는 농민 종교를 기반으로 한 呪術정치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술 기복의식으로 최저임금을 극단적으로 높이면, 그에 상응하는 임금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 믿음은 전형적인 무당의 무교 믿음이다. 그렇게 좌파 정치권이 무교를 통해서 권력집중을 구현해 왔다. ‘떡’을 먹으려면 무당(정치인)말 잘 들으시요! 하는 분위기다.


민주화 이후 민주화 귀족들의 이기주의를 통해서 허수아비 수준의 권력이 된 정부의 무력감을 도외시하고, 자기 속을 풀어달라는 차원에도 주술기복 심리가 작렬한다. 좌파 정치의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경제관료들은, 어느 새 경제성장(떡)을 먹으려면 무당(관료)말 잘 들으세요! 하는 자기들 판 巫敎주의를 구사한다. 무교적 조화는 시민사회의 합의·동의가 아니다. 아울러, 지속가능성도 안정성도 없다. 정치권력(무당)과 배후집단간(대중)의 연계고리가 처음이자 전부다.


북한의 공격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을 유지하고 금강산관광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궁극적으로는 무너져야만 한다는 도교적(무교적) 이분법을 믿는 집단이란 공통분모를 깔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되는 ‘조화’라는 것은 그런 지향의식을 가진 청중에 행하는 ‘정치 굿’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을 전제로 무교적 조화주의를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농민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20여년째 뻥을 때리고 계신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현대정치는, 좌파 세력의 배경종교인 ‘新종교’의 좌파 배후 문제를 전면화하지 않고는, 종북이나 친북 담론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4.3 항쟁, 여순사건, 대구폭동 등 남로당과 합작한 신종교 농민들의 후손의 현실정치 참여와도 상관이 깊은 것을 알수 있다. 당시, 박헌영이 내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는, 신종교인과 남로당의 합작 상태를 말한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위원회에서 드러난 것은 문맹 남로당원의 존재였다. 공산이념을 알지도 못하니, 문맹 남로당원은 억울한 피해자라는 주장이었다.


배제주의나 분리주의, 혹은 낙인찍기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중앙권력을 다시 창출하던지, 아니면 국민 상호간의 소통의식을 제대로 쌓아올리는 일을 하던지 양자택일 밖에는 없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보수 사회는 강력한 중앙권력을 폭파하고 좌파의 허수아비 정부 권력 논의에 협력하면서, 강력한 중앙 권력이 있었을 때 문화를 유지한다. 그런 향수에 젖은 국민들의 욕망을 해주지 못하는 정부를 야유하면서, 자기들에 권력을 집중한다. 恨풀이라 하여 무당이 자기 권력 집중하는 양식을, 좌파정치가 써먹는 순간에 우파정치도 써먹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反싸드 문제는 건국 반대 운동을 벌이며 남로당에 연합했던 세력들의 후손을 결집하는 흐름에 맞서서, 대한민국 본래 국민윤리로 국민을 불러내는 흐름을 해야 극복할 수 있다. (종북, 친북, 친중 사대주의 등 조갑제 프레임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조갑제 프레임은 장년층 향수에 기대어 우리가 문화 주도자라는 전제에 있다. 사실은 그에 정반대라는 게 문제다.) 민주정의당 문교부 ‘국민윤리’(1982-1990) 교과서 이후 멈춰버린 국민윤리 교육을 오늘에 맞게 다시 되살리는 문제가 시급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임시정부와 연관된 親中 민족해방운동 동원 기제와 맞서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더불어 형성된 새로운 사회계약적 질서로서 국민 동원기제가 드러나야 깨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조갑제씨가 보여준 이승만과 박정희의 무교적 영웅기제는, 좌파 민족해방 운동기제를 180도 뒤집은 것이래서, 좌파 논거와 맞싸우는 유효한 반대가 아니다. 싸드가 배치될 시기는 내년 하반기로 ‘대선’에서 득표전쟁으로 중요한 상황이다. 국민윤리로서 48년에 새로운 국민 계약이 형성됐다는 차원으로 동원기제가 없고, 반기문 영웅주의만 종속돼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주의로 몰려가면, 상당히 보수사회가 불리해질 수 밖에 없다.


박정희 때 홉스의 『리바이어던』중심의 법가적 권력 집중 개혁 때도, 국민에 양보가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좌파의 무교적 조화주의와 감정 정치의 추세와 발맞춰서, 우파의 무교적 조화주의와 감정 정치로 작은 규모로 구현했던 이들이 자기의 주도권을 내려놔야 개혁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정치는 좀처럼 이기주의를 내려놓지 않는 문제와 맞물린다. 새누리당의 親李세력은 그들의 이념이 기독교장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력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새누리당의 親朴세력은 애국심보다는 박근혜란 브랜드를 이용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과거 대한민국은 ‘국가의 소중함’ 안에서 호국불교·충군애국·민족기독교·인내천 담론을 연결시켰다. 지금은 서로 연합할 국민 상대방에게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측면으로 다시금 무너진 ‘국민윤리’의 새 제단을 쌓아야 한다.


무교적 조화주의는 틀렸다.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며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적 소통적 조화주의가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전국적인 연합조직 형태로 국민에 가시적인 모범으로 드러나야 한다. 반기문씨가 국제연합 수장인 것은, 세계시민윤리에 맞춰서 국민윤리를 개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참조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원조인 독일 기본법에는, 파시즘 체제를 견뎌낸 독일국민의 ‘우상숭배 금지’논리가 담겨 있다. 국가로든 영웅으로든 그 어떠한 형태로든 권력집중을 반대한다. 그것은 偶像으로 보는 것이다. 우상화된 국가가 잘못이면, 우상화된 영웅도 얼마든지 동일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상식적 문제가 제대로 소통되는 대한민국이 돼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고종황제 안에 한 종족이었음을 강조할 당시의 윤리를 자자손손 끌고 가는 이들에 저항하는 것은, 그 이후에 형성된 국민의 새로운 결단과 각오를 매 순간 갱신하며 계승하는 방법 밖에 없다. 우상화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향한 새로운 국민의 협력정신의 계승 뿐이다. 보수 민주화운동은 시민사회적 협력 기제로서 법치주의를 구현한다고 해놓고서, 하지 않았다. 보수 민주화운동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여 확장하면, 좌파의 反싸드 논리는 설 땅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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