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연경 교수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SFC
잊혀진 부활
한국 교회에서 부활은 거의 왕따에 가깝다. 십자가 찬송은 연중무휴 눈물 나도록 은혜롭지만, 부활에 관한 찬송은 한 주만 지나도 마냥 썰렁하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 품에 있지만, 부활은 일 년에 한 번 어색한 손님처럼 잠시 왔다 금방 사라진다. 십자가의 의미는 마음에 절실히 와 닿아도, 부활은 어디 쓰는 물건인지 몰라 당황스럽다.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했다는 역사 강의가 끝나면, 별로 덧붙일 말이 많지 않다. 죽음은 잠시였고 부활이 현실인데, 오늘 우리에겐 십자가만 현실이고 부활은 반짝 기념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빈 무덤 앞에서보다는 갈보리 언덕 위가 더 편한 우리들의 영성은 건강한가?
부활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칭의를 말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많은 이들은 칭의가 부활과 관계된다는 말에 깜짝 놀란다. 십자가의 속죄가 칭의의 근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롬 3:24-25). 하지만 칭의는 “대속”보다 크고, 따라서 십자가 이상의 무엇을 요구한다. 바로 부활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른 척 하고 넘어가지만, “예수는 우리 범죄함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고, 우리 의롭다함을 위해 살아나셨다”(롬 4:25)는 바울의 선언은 결코 빈 말이 아니다. 바울은 부활 없이는 칭의를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 없이도 잘만 산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었다는 “십자가의 칭의”는 바울이 선포한 “십자가와 부활의 칭의”와 같은 것일까?
부활의 중심성
복음서의 부활 기사나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잘 말해주는 것처럼, 교회의 실제적 시초는 부활이었다. 십자가라는 불발탄에 실망한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었다. 십자가는 불행한 비극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런 실망에 익숙했다.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가 아닐까” 바란 적도 있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이런 희망을 가볍게 지워 주었다. 하지만 이런 실망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실망과 슬픔에 눌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물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남”은 그들의 실질적 세계관 속에는 없는 개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못 알아 본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만났고,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라는 이 충격을 통해 세상의 뒤바뀜을 체험하였다. 이것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사태의 핵심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처음 복음이 선포되었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는 설득해야 할 메시지가 아니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부활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났고, 부활이라는 초월적 체험 앞에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으로 새롭게 이해되었고(행 2:24; 3:15; 롬 8:10-11 등),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없이는 설명이 될 수 없었다. 예수 역시 메시아일 뻔하다가 실패한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한 마디로 기독교라는 놀라운 현상은 이 부활 체험의 “역사적 파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구 철학의 전 역사가 플라톤에 관한 주석이라면, 기독교의 전 역사는 바로 이 부활 사건에 관한 “역사의 주석”이다. 부활 없이는 아무 것도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순절 성령조차도 예수의 부활과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부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행 2:32-33).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물론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요약한다(고전 2:2).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지만 바울은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만을 전파했다(고전 1:23). 하지만 우리는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말했을 때, 그는 성령으로 성도들의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곧 바울 속에 내주하면서 그의 삶을 인도하는 부활의 주님이었다(갈 2:20). 사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먼저 만났고, 이 부활의 빛 아래서 십자가의 비밀을 보게 되었다. 바울의 말은, 지금 우리들의 교회에 성령으로 임재하신 부활의 주님,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 분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 속에서 십자가는 그 자체만으로 구원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 더 나아가 재림이라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이해되었을 때 본연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송가”에서처럼, 종종 부활과 승천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보다 깊이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등장하기도 한다(2:5-11).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는 사실은 당연한 고백의 일부다. 쉽게 잊히지만, “주 예수”라는 말 속에는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강한 고백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성도들은 지금도 하늘로부터 이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린다(3:20). 하지만 이 부활과 승천은 소위 승리주의적 사고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이 부활과 승천은 실상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신 사건,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적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여정이 전제되어 있다. 바울의 논리 속에서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 겸손한 자기 비움의 직접적인 결과로 제시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2:9). 이처럼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의 본질을 밝혀준다. 뒤집어 말하면, 이렇게 십자가가 “불발탄” 아닌 의미 있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이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졌다는 깨달음에 근거한다.
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유독 십자가가 부가되는 것은 세상 지혜에 민감한 고린도인들, 또 율법에 현혹된 갈라디아인들의 행태와 관련된다. 예수께 대한 신앙은, 세상 지혜이건 유대 율법이건, “육체”에 속한 것들과의 단호한 결별을 요구한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 지혜를 폐하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죽음”으로 묘사된다. 바울은 이런 단호한 결별을 강조하는 한 방법으로 십자가라는 과격한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언제나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고전 15:12-20). 그리고 이 분은 지금 그를 믿는 자를 “살리시는 영”으로 교회 공동체를 다스리신다(고전 15:45). 아무리 십자가를 강조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고백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근복적인 고백에 속한다(갈 1:1; 고전 1:7).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
다소 역설적이지만, 바울의 삽자가 “편집증”은 실상 부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에 속한다. 물론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죽음, 곧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죽음으로 이해된다(롬 3:25; 갈 1:4). 하지만 이 죽음은 과거의 죄에 대한 대속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새로운 삶의 기초로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 또한 품고 있다. 바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가 선포한 십자가 복음의 배후에는 이 십자가 복음이 “성령과 능력”의 원천이라는 깨달음(고전 2:1-5), 곧 이 십자가 복음에 성령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롬 1:16; 갈 3:1-5, 14). 물론 이 성령은,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킨다(롬 1:4; 엡 1:20).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던” 창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죽은 몸을 살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롬 4:17) 하나님은 이제 예수의 부활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면모를 확증하셨다. 그리고 이 부활의 역사는 죄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성령의 움직임을 통해 확인되고 구체화된다(롬 6:4; 7:6; 8:1-4). 바울은 이 능력에서 복음의 본질을 보았고, 그래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길 좋아했다(롬 1:16; 고전 1:18). 이 능력(power)은 “말”(word)에 불과한 세상의 지혜(고린도전서)와 “의문”(letter)에 불과한 유대의 율법(갈라디아서와 로마서)으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구별한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은, 세상의 지혜나 유대의 율법/ 의문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들과 달리 십자가의 복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바로 이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4:17, 22). 그는 하나님에게서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는 창조주의 능력을 보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나(롬 4:23-24). 이 “우리”란 다름 아닌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들, 그래서 이 부활 신앙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우리들이다(롬 4:24).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고백하지만(롬 10:10), 여기서 믿고 고백하는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부활 신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롬 10:9).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만, 이는 우리가 헛되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헛되지 않은 신앙이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굳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부활신앙을 가리킨다(고전 15:1-11, 14, 17).
회복해야 할 부활신앙
성찬에 관한 글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눈물로 성찬을 먹지만 초대교회는 기쁨으로 성찬을 나누었다(행 2:42, 46). 그들에게도 성찬은 주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즐거운 기다림의 문맥에서였다(고전 11:26; 롬 5:1-2).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바라보는 십자가는 나를 대신한 “고통”에 대한 심리적 심취가 아니라, 죄에 대해 죽게 함으로써 새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한다(고후 5:14-15). 그래서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심” 혹은 우리 자신을 씻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십자가의 피는 “죽은 행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여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든다(히 9:14; 10:22). 또한 우리를 씻어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혹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제물로 설 수 있도록 만든다(엡 5:26-27). 우리가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부활을 잊은 교회?
어쩌면 부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무시는, 세상적으로 큰 “힘”을 과시하면서도 정작 복음의 “힘”은 과시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기력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은총과 믿음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 바빴던 교회는 복음 공동체다운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힘은 쉽게 교회를 물들이지만, 복음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모습은 확인하기 쉽지 않다. 소위 “성공한” 교회와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소리겠지만, 참된 복음의 흔적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충격”이 필요하다.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음은, 해답 없는 질문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졌고, 이 부활은 현재 우리 삶의 본래적 정황이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새로움”(롬 6:4), 곧 “영의 새로움”(롬 7:6)이다. 이 새로운 능력을 체험하며 드러내는 것이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참된 성찬의 방식이 될 것이다. 갈보리 언덕의 슬픔은 빈 무덤 앞에서의 놀라움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뜨거움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부활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성도들이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되도록 기도했던 바울의 간절함이 우리의 간절함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엡 1: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