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중략) 왜 주님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셨을까? 이 질문에 실패한 자를 일으키는 섬세한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실패로 인해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에게 죄와 실패를 잘못 지적하면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그를 회복하기보다 그를 더 망가트릴 수 있다. 베드로의 마음과 그의 상실감을 가장 잘 아는 주님이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밤새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물 가득히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 수가 153마리였다. 바다 속 어느 곳에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마음에 센서라도 달아놓으신 듯 우리 마음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시다. 우리 마음의 동기와 욕망과 추구와 끌림을 잘 아신다. 베드로가 비록 자신이 장담한 대로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에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진심과 열정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 진심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내가 그 진심을 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심을 직관적으로 안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로 인해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베드로도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아시나이다는 말에서 주님이 자신의 진심을 아심을 그가 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주님이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다.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 생각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세 번 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그의 과오를 상기시키시는가. 그것은 그의 실패를 온전히 만회해주시기 위해서였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을 이제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상쇄해버리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변절자가 아니라 세 번이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자로서의 자신감과 권위와 명예를 회복해주셨다.
출처 : 박영돈 목사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