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로서 문필가였던 전영택은 일찍이 그의 스승 도산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아래 내용)
(도산 안창호) 선생은 20년 전 소년시절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고 열심으로 전도를 했읍니다. 그는 그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새교육을 힘쓰는 한편 교회를 세우고 일심으로 전도를 하고 친히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의 시대의 우리 민족이 당한 처지와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한 운명으로 보아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활동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요 가장 큰 사명이라고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극히 사랑하고 애독하였읍니다. 특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한 말씀이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한 말씀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나니라' 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민족지도 이념의 근본 사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사람은 정치가나 교육가나 종교가나 문학자가 되기전에 먼저 하나님앞에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저한 신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친히 성경을 애독하면서 청년들에게도 읽기를 권했습니다. 선생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웨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을 하고 회개를 하면서도 신앙과 희망을 가지고 기도로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읍니다. 이 기도의 정신과 성경의 교훈은 그의 평생의 나라를 위한 활동을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애국자요 민족운동가이었으나 종교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판에 박힌 소위 종교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신과 그 생애로 보아서 또 종교가라고 보아도 잘못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 어른은 철두철미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였고 사(私)를 떠나서 오직 '공'(公)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부정(自己否定)의 정신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높은 자기희생의 정신을 배와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겠읍니다.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 4. 12 -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432쪽. 출처 http://www.kaedc.org/library_1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