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양관 뒷 산을 걸으면서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꼭 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로는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길이 정답일 때가 많습니다.
살 길인 것 같아 보이는 길이 죽는 길이고 죽는 길 같아 보이는 길이 사는 길일 때가 있습니다.
이제야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고 순종, 또 순종하는 것 만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참 어렵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결단은 분명해졌습니다. 그 고비는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의 문제가 느껴집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친밀함의 문제입니다.
이번 제자훈련 세미나 때, 주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갈망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주님과의 친밀함 그 자체 만을 위한 갈망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진정으로 순종의 삶,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열매 없는 사역에 지치고 좌절합니다.
이유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이 없는데, 무슨 순종의 가능하겠습니까?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순종에서 갈렸습니다.
아말렉을 치러 갈 때,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에 대하여 사울 왕은 “처음부터 못합니다”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순종하려 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전쟁을 하다가 잊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진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아각 왕과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가지고 왔습니다. 아각 왕은 백성들 보는 앞에서 죽이고 소와 양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물로 삼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도 사울 왕은 오히려 어리둥절했습니다. 자신이 불순종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충성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에는 철저한 순종이 있었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나발을 죽이려 갈 때, 아비가일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듣고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으나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임을 기억하고 손대지 않았습니다. 밧세바와 사이에 난 아들이 죽어갈 때, 그렇게 울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으나, 결국 죽은 것을 알고는 일어나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맞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처분을 맡기고 피난을 떠났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따라나오는 제사장을 돌려보냈습니다.
성전을 지을 준비를 다 해 놓았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자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다윗의 순종이 이 정도였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과 다윗의 순종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거룩한 사명감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깨달았다고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명감 만으로는 안된다’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신 행 1:4 말씀을 계속 주십니다.
사명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먼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깨달아졌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임하신 것 보다 더한 친밀함이 있을까요?
언젠가는 생명도 바쳐야 하는 주님의 명령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순간의 순종은 평소에 주님과 친밀히 동행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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