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희망을 말하다―③ 항일·독립운동 앞장]
일제 “굴하지 않는 교회가 무서웠다”
민족이 고난을 당하던 현장에는 어김없이 교회가 서 있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뒤 이어진 암울했던 일제 치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독립투사로 나섰다. 전국적인 규모로 펼쳐진 3·1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고, 독립협회와 임시정부 등 각종 독립운동 기구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제89주년을 맞이한 3·1운동과 함께 한국교회의 독립운동을 조명해본다.
'동포여 나의 용모를 기약하지 마오 / 하늘이 주신 충렬 / 몸과 뼈에 새기오 / 삶과 죽음의 종적은 / 바야흐로 다시 이어지나니 / 천국은 이미 의사(義士)들에게 열려 있소'(기독신보 1920.12.8)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강우규 전도사가 1920년 11월 말, 조선총독에 대한 폭탄테러를 감행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형장에서 남긴 유시(遺詩)다.
일제 강점기 시절, 무수한 기독교인이 강 전도사처럼 독립운동을 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목숨을 건 구국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교회와 학교뿐 아니라 국내외 곳곳에서 조직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사학자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논문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등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은 1890년대 후반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지도부에 이미 윤치호 서재필 등 기독교인이 포진하고 있었다. 배재학당의 학생회 조직인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몰렸고, 독립협회가 주축이 된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에도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줄을 이었다.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마다 기독교인들이 핵심 멤버로 참여했던 것이다.
교회에서는 기도회 등을 통한 항일운동이 잇따랐다. 신앙과 독립운동이 자연스럽게 접목되던 시기였다. 1905년 9월, 제5회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해 11월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에는 정순만 전덕기 등이 주축이 돼 서울 상동교회에서 일주일간 '연합 위국 기도회'가 열렸는데, 연일 수천명이 모였다고 한국 기독교사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감리교회 엡워스청년회의 상소운동이 유명하다. 평남 진남포교회 엡워스청년회 총무였던 독립운동가 김구도 을사조약 철폐운동에 참가했다. 기독교인인 최재학 이시영 등은 조약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일본 헌병에 붙들려 70여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항일운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세저항운동으로까지 확산됐다. 납세거부투쟁과 국채보상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선교사 등은 설교를 하면서 "일본의 지배 하에서는 세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극단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했던 정재홍과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던 전덕기, 선천경찰서를 폭파해 사형을 당한 박치의 등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의 활발한 항일 독립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최근 재번역돼 출간된 이승만 박사의 저서 '한국 교회의 핍박'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강한 공동체 정신과 높은 교육열, 외국 선교사와의 끈끈한 관계 등이 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동력으로 꼽힌다. 이만열 교수는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일찍부터 애국심을 길렀던 게 중요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항일운동이 본격화되던 192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임시정부 운동과 외교운동, 무장투쟁을 비롯해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 사회 전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주축을 이뤘다.
항일 독립운동의 큰 획을 그은 3·1운동과 이를 계기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도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단연 돋보였다. 거사(巨事)를 준비하던 시점부터 2개월 넘게 이어진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다.
1919년 3·1운동 때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중 기독교인은 16명이나 된다. 감리교측이 9명, 장로교가 7명이다. 이들은 3·1운동이 전국에 확산될 수 있도록 전국의 주요 거점과 지도자를 제공하는 등 조직적인 활동에 앞장섰다.
기독 여성들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10월에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는 반일활동으로 감금된 성도가 2656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여성 성도가 531명이나 차지할 정도로 여성의 활약상이 돋보였다. 유관순과 김마리아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들도 모두 교회 여성지도자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는 기독교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임시정부 모체가 된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운영한 곳이 신한청년단이었는데, 멤버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항일운동이 거세질수록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심해졌다.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구한말 비밀독립운동조직으로 창건된 신민회에 대한 탄압이었다고 하지만, 연루자들은 대부분 서울과 서북지방의 기독교 지도자였다.
1915년, 일제는 '사립학교법'을 고쳐 미션스쿨에서의 성경교육과 종교의식을 금지하는 등 기독교계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1919년에는 829개 종교계 사립학교 중 36% 정도인 298개교만 남았다. 3·1운동 직후 일제의 교회 탄압은 강도가 더해졌다. 의주교회 제암리교회 등 교회당에 대한 방화와 학살을 일삼는가 하면 항일운동에 가담한 목사와 장로 등 3800여명을 체포하거나 구금했다. 1919년 말, 일제 헌병대의 피검자 종교별 조사에서 기독교인은 3426명(전체의 17.6%)으로 가장 많았다.
일제의 한국 교회 탄압은 곧 일제가 한국 교회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말해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사 저서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한국 교회를 상당히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무서워했다.
각종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을 붙잡아 고문하면서도 일본 헌병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무릎을 꿇을 때가 허다했다.
"우리에게 비록 군함과 대포는 없을지라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면 두려울 게 없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http://www.1907reviv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