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물로 배 채우던 천 판사 소년기
-교회 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함께 놀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전도팀을 따라 죄다 교회(현 아미동 아름다운교회) 간 거죠. 뒤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고신 측 교회라 엄격했어요. 중·고등부 회장 등을 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부산·경남지역서 유명한 무척산기도원으로 수련회도 가고요. 7남매나 되니 집에선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숙제만 하고 바로 자버리죠.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교회 가서 새벽기도 하고 공부했습니다. 교회는 장의자에 누울 수도 있고… 하하. 그러니 공부 못하면 안 되잖아요.”
-주일을 지키기 위해 수학여행을 안 가신건 아니죠.
“친구들에게 주일성수 때문이라고 둘러댔죠. 실제는 수학여행비를 못 내서였고요. 수학여행 못 간 친구가 10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주일 낀 여행 일정 때문에 안 간 거였어요.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 자녀였던 거죠. 그 친구들에게 ‘나도 그렇다’라고 해야 했죠.”
-과외는커녕 부교재 살 돈도 없는데 공부에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아뇨. 똑똑한 건 아닙니다. 제가 좀 숫기가 없어 ‘삐뚤어 나갈 능력’도 없었어요. 공부와 교회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셈이죠. 가난은 그 무렵에도 계속돼 입시원서도 못 살 형편이었죠. 재수는 언감생심이고요. 대입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됐습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면서요.
“대학 원서접수 마감 날 아미동에서 터덜터덜 걸어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 쪽까지 내려왔는데 학교 친구를 만났어요. 원서접수 마감시간 다 됐는데 뭐하냐고요. 내 처지에 무슨 대학이냐고 했죠. 친구가 ‘야 무슨 소리야 서둘러’ 하며 원서를 사줬어요. 당시는 서점에서 원서를 팔았잖아요. 부산 사람이면 다 아는 문우당이었죠. 그리고 모교인 부산남고에 들러 지원서를 작성해 부산대에 가니 접수마감 30분 전이었습니다. 그가 박명규(세무사)라는 친구였죠. 재작년 창원에서 열린 제 책 출판기념회에서 그 친구를 소개하며 ‘하나님이 보내준 천사’라고 얘기했더니 ‘내가 그랬냐?’ 하더군요. 청소년 특강이라도 있으면 이 사례를 얘기해요. ‘여러분의 배려가 누군가에게 삶의 전환점을 마련한다’고요.”
-가난을 피해 군대 가시고, 전역 후에도 희망이 없었죠.
“가난은 삶의 의지를 꺾는 무서운 질병이죠. 부모와 형제들, 교회 식구들, 이웃들 아니면 내가 버틸 수 있었을까 되돌아보곤 합니다. 내 인생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입니다. 이들 덕에 5전 6기 만에, 스물아홉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까요.”
“교회가 아니었으면 나 없었을 것”
-부인보다 ‘꼿꼿했던 신앙생활’이 역전됐다면서요.
“하하. 제가 고신파 교회를 다녀서 좀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한데 나중에 역전됐어요. 저는 판사 생활 20년만 하고 나와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 했어요. 제 형제자매 누구도 대학 나온 이가 없어요. 돈을 벌어 돕고 싶었죠. 그러려면 붙임성도 있어야겠기에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큰 교회 다녀야 하나 생각했죠. 30대 초부터 그런 거죠. 그런 저를 위해 아내가 기도했어요. ‘당신이 이러려고 판사된 거 아니잖나’고 하더군요. 아내와 장모님 기도 아니었음 정신 못 차렸을 겁니다. 2006년 무렵 술 끊었어요.”
-최근 교회 초청 비행소년문제 특강을 통해 청소년지원센터 승합차 운영 문제 등을 해결해 주셨죠.
“제 힘이겠습니까. 교인들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신 거죠. 서울 온누리교회 마리아형제팀 초청으로 휴가를 내서 올라가 특강을 했어요. 3000여명이 참석해주셨죠. 14군데 센터 중 3곳의 승합차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정치인이 되시면 국회 등이 무관심한 ‘비행소년 전용 공동생활가정’ 입법 등이 수월하실 텐데 정치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전혀요.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법조인이 법복 벗었다고 부와 권력에까지 욕심내면 안 되죠. 성서적이지도 않고요. 저는 비행소년을 비롯해 법조인이 되려는 후대들에게 모범이 되는 법조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후기. 천 판사에게 폐가 안 되리라 믿고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요? 사랑과 신앙이 아니면 변화가 안 됩니다.”
천종호
부산 아미동 산동네 출신.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97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부산고등법원, 창원지방법원 등을 거쳐 현재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부장판사. 2010년 비행으로 내몰린 아이들 재판을 맡으면서 매년 발생하는 10만명의 비행소년 선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비행소년지원센터인 사법적그룹홈 14곳을 출범시켰다. 저서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가 있다. 부산 금정평안교회 피택장로.
출처 : 국민일보 일부 발췌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219835&code=23111111&sid1=ch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