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가야 한다구요?”
이번 주간 큐티 본문 중 빌 3:12-14 말씀을 묵상하다가 의문이 생긴다고 질문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의 후반기인 로마 옥중에서 쓴 서신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으면서, 빌 3:12에서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한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미 죽었다’고 한 사람이 :13에서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라고 말할 수 있으며 :14에서는 “푯대를 향하여 ...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경건의 ‘노력’에 대한 말을 들으면 매우 예민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만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경건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면 율법주의, 공로주의로 심각하게 타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려는 한편 일리가 있지만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생각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우리가 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하였다면, 혈기도 정욕도 음란함도 욕심도 시기 질투도 다 사라져 버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니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죽은 것이 사실이지만, 육신이 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것은 죄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죄의 충동이나 유혹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새 사람은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자이며, 주님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여전히 육신의 역사는 계속 일어납니다. 빌 3:20-21에 의하면 우리 몸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서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은 우리도 여전히 죄의 속성을 가진 육신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리 몸도 온전해질 날을 기다리며 삽니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은 새 사람도 흔들릴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의 욕망도 없고 유혹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새 사람도 얼마든지 육신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후에도 회개하고 다시 깨끗이 함을 받는 것이 계속 필요합니다. (요일 1:9)
그러나 더 이상 평생 죄의 종노릇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아닙니다. 새사람을 입은 우리는 죄로 인하여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은 이미 죽음으로 처리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는 믿음’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충분히 죄를 이길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임하신 주님께서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옛사람이 죽고, 주님을 따라 사는 새사람의 특징은 육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옛사람은 이런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는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 안에서 거듭난 자만이 힘써 달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음박질 하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