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설교는 1년 내내 교회에서 전파되어야 한다
폴 비슬리 머레이(Paul Beasley-Murray)의 「부활」 (The Message of the Resurrection)에 근거를 두고 있다. 비슬리-머레이는 부활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활 설교는 부활절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아니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부활절부터 오순절까지의 50일을 말하는 부활절 계절(Eastertide)에만 국한되어서도 안된다. 부활설교는 1년 내내 교회에서 전파되어야 한다. 바울이 아덴을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와 부활’을 너무 강하게 전해서, 어떤 아덴 사람들은 그가 예수라는 신과 아나스타시스(Anastasis: 부활을 뜻하는 헬라어)라는 두 신을 전파하고 있다고 혼동했을 정도였다(행17:18). 그런 혼란을 가져온 것은 유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교훈을 준다. 위대한 십자가의 신학자인 바울마저도 부활의 메시지를 최고로 중요하게 여겼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설교가 이러한 부활의 분위기를 잃어버린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따금 기회가 닿아 다른 교회를 방문하여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 보아도 주된 분위기는 부활이 아니었다. 어떤 부류는 성육신의 위대한 기적이, 다른 부류는 십자가가 초점이다. 이런 많은 교회들에서 역동성의 부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교회가 주님의 십자가만큼이나 빈 무덤을 묵상했다면, 교회의 삶이 지금보다 더 쾌활했을 것이며, 교회가 세상에 기여하는 바는 지금보다 더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부활의 찬송들은 부활절에만 부르는 것이 현실이다. 어쩐 일인지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부활의 사람들임을 잊어버렸다. 부활의 사람인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 이 복음은 매주 그리고 실로 1년 내내 날마다 복된 소식을 의미한다.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실로 부활이 없다면 복음은 없을 것이다. 전 캔터베리 대주고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의 말을 빌리면, “부활이 없는 복음은 그저 복음의 마지막 장만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복음이 아니다.” 또한 현 캔터베리 대주교 조지 캐리(George Carey)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상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교회도 그리고 분명 새 천년 기념식도 없을 것이다.” 램지와 캐리는 사실상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바울의 논지를 재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 장을 다음과 같이 그림처럼 생생하게 플어쓴다. “그리스도에게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이 연기와 허상이며, 너희가 너희 생명을 건 모든 것이 연기와 허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너희가 하는 모든 것은 길을 잃고 어둠 속에서 정처없이 헤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 단지 몇 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받은 약간의 영감이 전부라면 우리는 매우 가련한 운명이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조항이며,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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