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조상’ (우상)숭배에 빠진 한국교회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사는 ‘억!!’소리나게 많은 분파주의로 기록된다. 공산주의 철학으로 공산주의를 읽지 않고, 유교신앙으로 공산주의를 읽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균전제가 실학에서 강조되더니,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서 핵심 키워드가 됐다. 조선공산당운동과 함께 움직인 부설문화단체 kapf를 지원한 것은 천도교요, 천도교는 유교의 대중화라고 볼 수 있게 모든 종교적 틀거리가 유교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민족운동사에는 신간회 해산 내린 소비에트는 개새끼 짓을 한 거지만, 속사정을 보면 소련 사람이 한국인의 붕당 당쟁에 혀를 내두른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조선조에서 궁물이나 관직 바라보거 충성하듯, 소련이 주는 이익에 그토록 쉽게 복종한 것이었다.
공산당과 각을 세운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는 과연 ‘칼빈주의’ 성경신학으로 성경을 쭉 읽어왔을까? 공산주의 분파주의 못지 않게, 한국기독교도 분파주의로 참 욕이 저절로 나온다. (물론, 교회 상층 엘리트 그룹에 발을 담근 사람들은, 속으론 욕해도 겉으론 욕할 수 없다. 욕하는 즉시 그룹에서 ‘팽’될 꺼니까. 욕을 해도 평신도가 가능하다)
1950년대 후반에 출간된 에큐메니칼 관련 기독교 이론서는 자신의 책이 한국에 소개된 최초의 에큐메니칼 이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묻는다. 1920년대에 형성된 교회연합 대체 무슨 근거로 이루어졌단 말인가?
답은 1920년대에 유행한 기독교 사회주의를 추적하면서 어지간히 풀리게 됐다. 기독교사회주의는 신경향파 기독교문학과도 겹쳐진다. 이덕주 교수 같은 분이 토착화신학으로 인위적으로 강조안해도, 최소한 1920년대 까지의 일반 한국현대사 역사에서 지배적 시대 인식소는 ‘유교’였다고 보는게 타당해 보였다. 길선주 목사는 도교를 성경 읽기에 도입했다.
한국인인데 아시아 종교 차용하면 어떠하느냐? 서양 고대철학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은 ‘로고스’가 ‘뮈토스’(신화)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안다. 유교, 도교, 불교 등을 아우를 만한 신화를 창출한 제사양식으로 제천행사를 들 수 있다. 그런 제천행사에서 가능한 로고스는 바로 呪術이다.
아시아 종교는 농경사회 문화로 구지가처럼 ‘거북아 거북아 머리 내놔라,안 내놓으면 팍 구워 뻔질랑께’ 하는 취지가 강하다. 아시아 종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아울러, 굿에서 배설감은 정확히 ‘구속신앙’과 180도 다르게 충돌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과정에서 농민들의 정서에 맞는 농민종교로서 유교의 대중화인 신종교가 유행했다. 기독교는 그 신종교에 乙로서 존재했다.
과거 한국교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을 모두 '중간지향적=성경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은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차원의 딴길 가지 말라는 것이다. ‘中庸’의 맥락을 던져 읽는 것은 反성경적인 해석이었다. 中庸은 곧 유교적 씨족 장이란 우상을 전제한다. 周나라 임금의 임금다움이 세계의 질서라고 본 논리를 말한다.
그 中庸의 “조화”가 성경적으로 가능한 논리일까?
앞서 이야기했다.
中庸은 히브리적 사유가 아니라 중국 짱개 민족 신화에서 떨어진 로고스다. 중국 민족 영향권에서는 가무일체가 된 귀족계급의 제사와, 그 곁에 곁가지로 도는 일반 백성과 노비로 구분지어진 신분제 사회다. 中庸의 조화가 가능하며 국제사회도 된다고 보았던 이들은, 바로 해방공간 중도좌파 성향의 개신교인들의 믿음이었다.
나는 지금 신학서적이 없어서 그 논리로 가면 이해를 해줄 수 있다.
지금, 기독교서적이 엔만한 공공도서관에는 넉넉히 깔려 있다.
그거를 팽개치고, 기독조상으로 달려가는가?
기독교 간판 둘러싸고 ‘서원’에서 도통이 되시는 오야붕 섬기기 반복하나? 그런거냐? 예전에는 회개란 표현은 부끄러움과 죄성과 일치됐다. 이젠 정말로 ‘小人’이란 말을 쓰면 칼 부림 나는 조선조처럼 멘탈이 바뀌었다.
물론, 아시아 종교를 믿는 다른 분들과 더불어 사는 게 한국기독교인이다. 그러려면, 더불어 살려면 기독교인 자체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흔들릴 바에야 ‘분리주의’가 맞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더불어 사는게 성경적 원칙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 더 해보자. 내가 예전에도 지적했지만, 참여신학이 과연 기독교 참여신학일까? 유교적 내성외왕 믿음에 교횟말 얹어쓰기일까? 유교 믿음인 경우가 많다.
기독신앙에서 동도서기란 가능할까? 진리가 동양이면 예수님은 왕따란 말이다. 가능하지 않다. 가능할 수도 없고, 가능해서도 안된다. 물론, 다른 믿음을 가진 한국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빛과 소금이 되는 차원으로서, 한국 종교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슬람에 선교한다며 이슬람을 공부하면서, 한국인과 더불어 산다며 한국종교에 무식한 것은 엽기 아닌가?
그 어떤 신학보다, 그 연고 지역의 기독교관련 인사의 스타일이 존중된다면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학적 다원성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중심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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