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으로 통일을 추구하니 혼란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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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나는 한국 사회의 최근 혼란은 민주화 이후 통일담론의 부실 때문이라고 본다. 붕당망국론으로 규정된 서로 다른 이익을 가지고 공적 의식 없이 매몰된 상황이 드러나나, 그것이 역설적으로 민주화와 통일을 구현한다고 포장되는 현실이다. 현실과 명분의 차이는 명백하나 이를 매스미디어는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외면은 우리 사회 엘리트 배경 연고집단과 동일한 세력이 국민에 영향을 주는 매체에 파견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신학은 천도교의 기독교화로 부르며 토착화신학이라고 부른다. 이는 철저한 서구중심신학이되 제3세계 신학을 장식품으로 보는(몰트만의 신학서적이 대부분 이런식이다) 시각과, 서구 신학을 그럴 듯하게 모방만 하려는 한국의 시각이 겹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민중메시아론으로서 민중이 주체이자 객체이고 자기초월체라는 것은 민중·민족을 道로 본 것이다. 사건으로서 민중은 心안의 氣철학으로 본 것이고, 마을은 교회로 보며, 아시아 사상의 상생화해는 서구의 계약주의 신학에 상응한다고 보고, 후천개벽의 기복적 종말론은 서구 기독교의 종말론의 전천년설의 상응하는 것으로 본다.
⑵ 민중신학과 서구 신학 개념은 다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과 유대교종말론을 예수 그리스도가 관장한다는 차원을 가진다. 그리고 헬라/유대교/기독교의 매개가 예수 그리스도란 차원이며, 영과 육을 아우르는 통전적 신학을 취한다.
그러나, 이게 천도교의 후천개벽 담론과 연결돼 왔다. 즉, 샤머니즘의 감정중심 자연주의가, 헬라사상의 과학과 이성중심의 자연주의와 동일시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기독교신앙의 안과 밖을 지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선교를 말한다. 이는 교회선교와 사회선교를 아우른다.
반면에, 천도교 안에 내장된 무속신앙의 탈혼망아 체험도 영과 육을 아우른다. 샤머니즘은 서구 무신론의 원탁에서 메시지청취와 기독신앙의 복음준수와 달리, 神을 찾아 무속사제가 떠난다. 이는 주술행위와 연결된다. 주술행위가 하나님의 선교 중의 사회선교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만유구원론은 기독교 세계 안과 밖 모두에 예수의 구원의식이 미친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이런 인식이 성서적 惡을 없애고 사랑의 하나님만 남긴다는 보수 정통신학의 훼손이란 측면은 별개로 하고, 일단은 기독교 테두리의 좌파적 극단이라도 기독교라는 인식을 갖자.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바르트와 본회퍼에 이어지는 시민사회 속에서 복음신앙이란 시대응답과 연결돼 읽혀진다.
반면에, 샤머니즘 종교다원주의는 샤먼(부족 神)앞에서 마을 구성원이 모두 응답받는 수준을 말한다. 샤머니즘 종교다원주의는 마을 공동체의식이란 고강도 획일성의 작동이고, 무늬만의 다원주의다.
기독교 종말론은 예수 구원의식이 담긴다. 반면에 후천 개벽 담론은 예수구원이 없다. 민중메시아론은 후천개벽담론에서 도가적 道를 하나님으로 보니 '셀프 구원'이란 차원을 담는데, 이는 언어 희롱일 뿐이다.
노자의 道는 하나님인가? 자기로 수렴되며 자기초월하는 대상은 道다. 민중을 이렇게 본다면, 한국 민중신학 엘리트들이 민중을 '나'와 '너'로 보지 않고, '나'와 '그것'으로 보는 속내를 노출시켰다고 볼 수 있다.
칼게돈 원칙과 노자의 待對원리는 같은가? 예수 신앙에서 신성과 인성은 분리불가능하다. 그리고 아시아 사상에서 어둠이 있어야 밝음이 있다는 수준도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칼게돈 원칙과 노자의 대대 원리는 같은 것인가? 대대원리는 샤머니즘 부족 神을 전제한 것이고, 칼게돈 원칙은 예수신앙을 전제한 것이다. 명백히 다르다.
⑶ 상생·화해 등 아시아 사상 待對원리와 민중신학이 만나는 차원이, 한국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민중신학 정치행사에서도 20세기 한국 新종교용어가 대폭 쓰이고, 남북관계에서도 대폭 쓰인다. 그리고, 이는 샤머니즘 부족 神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커텐 밖에 감춰진 종북연방제 주권을 정당화한다.
㈎ 통일신학은 남북한 아시아 사상의 待對원리와 기복주의적 극복을 의미한다.
예수신앙은 무속제사와 동일하게 보고, 그게 남북한의 대대원리이자 분만 모순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대대원리에 갇힌 恨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라는 게 민중신학진영의 논리다.
따라서, 성서적 義가 정치참여자의 기복적 의식과 겹쳐진다.
㈏ 여기서, '화해'담론의 반성경적 변조가 연결된다. 김정일이 화해협력을 추구했다는 것은 이런 전제속에서 드러난다.
아시아 사상의 대대원리 전제의 화해는, 마음 공부로서 샤머니즘 주권자를 인정하자는 도가적(非 기독교적) 수양의식을 전제한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의 화해는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며 쌍방이 회개하고 화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공산당을 무조건 인정하는 마음공부를 중심축으로 하고, 기독교 신앙의 화해를 곁가지로 섞어쓰는 신앙 혼합이 통일신학에서는 빈발하다.
㈐ 민주화와 통일운동이 하나라는 인식은, 좌파연고자가 甲이 되는 마을주의 공동체인식과 겹쳐진다.
민주화는 대대원리로서 다원적 인식을 인정하자는 것인데, 이면의 샤먼주권 인정을 포함한다. 제도권 안에서 민중세력은 도가 사상에 얹혀져 지배권력을 은폐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통일운동은 좌파 연고주의의 기복적 욕망의 지향성이다. 민중신학이 민중·민족을 道로 봐서 영원적 객체를 향한 만족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겹쳐서 볼 수 있는 만큼, 통일운동은 그 운동가의 핵심 인맥의 최초 욕망과 분리불가능하다.
⑶ 드러나는 현실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를 선 남북연석회의 추종 세력이 배타적 전체주의로 대한민국 사회의 전분야 甲질화가 빚어지고 다른 세력은 인간소외가 빚어지나, 이것이 보편민주주의처럼 포장돼 오고 있다.
⑷ 통일외교안보의 좌경화는 친중반미화로 말해지며, 이것은 사회전분야의 민중신학(사실상 천도교 지향성)의 지배화를 의미하고, 샤머니즘 조화주으이ㅢ 지배화를 말한다. 정치가가 잘못했다기보다 문화의 민중신학 도배로 인한 대중의식의 왜곡이 좌파정치를 부르는 것을 불가피하게 한다.
샤머니즘 조화주의로 남북문제를 바라보며, 이에 피해의식이 강한 좌파 연고인맥의 기복주의 욕망의 원색적 표출이 통일운동처럼 말해지고, 미국 북장로교 및 몰트만 같은 병신 기독교 지도자가 이를 추인하는 문제가 한국 자유민주주의를 위기로 빠뜨려 왔다.
남북문제가 샤머니즘 조화주의로 바라보니 자연히 절대자 샤먼으로 권력이 수렴되고, 국민은 통일문제에 철저하게 소외된다. 샤머니즘 조화주의를 국교금지 정교분리 종교중립 조문으로 철저하게 규제하고 국민의 참여의식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또, 대한민국 국민은 남북한의 자유민주 통일을 바란다. 시장경제 통일을말한다. 그 시장경제의 지속성은 북한체제의 가장 대척점에 있는 근본주의 보수교회의 신앙의 자유의 안정적 지속이 리트머스 시험지로 말해질 수 있다. 이런 것을 훼손하는 통일이라면, 칼빈주의는 세속사회 지도자에 NO라고 말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 샤머니즘 조화주의로 신비화시킨 공간에 좌파 인맥을 파견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모순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시민이 협력하고 노력해야 하는지의 관심이 너무 없었다.
모순에 있어서 좌파 확대 계기만 보지, 정부수준에서 조율도 안되고 시민사회에서 조율도 안되는 상태가 무한정 길어지고 있다.
⑸ 남북기본합의서는 세계시민주의에 입각해서 북한을 세계시민으로 끌어올린다는 차원을 갖고 있다.
반면에, 6.15는 샤머니즘 조화주의에 의해서 남한 국민의 대한민국 국민 복종성을 얼 빼듯 멍하게 하고, 그 사이에 좌파 권력이 들어차서 한반도에 북한 지지 쪽수를 늘려서 적화하는 흐름을 취하는 것으로, 장년층 보수 네티즌들에겐 드러나고 있다.
사상독재로 민중신학이 지배하는 속에서 6.15의 위법성 증명은 불가능하다. 사상독재로서 민중신학의 지배권을 헌법에 주어진 국교금지 정교분리 종교중립 조문으로 깨뜨려야 위법성이 논해질 수 있다.
⑹ 보수 내부 문화도 민중신학 지배문화를 뿌리 뽑기는 커녕 고정하는 차원이 드러난다.
- 헌법에 주어진 사회계약주의로 대한민국 국가성립을 논하긴 커녕, 무속영웅주의로 이승만을 정당화한다. 이는 이승만을 옹호하면서 외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가성을 논한 것 같지만 사실상 논하지 않은 것이다.
- 샤머니즘 조화주의로 좌파연고주의와 이면의 지하당을 정당화하는 어버을 180도 뒤집어 보수연고주의와 보수시민단체 연합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보수시민단체가 비슷한 논리로 자기 정당화하는 어법을 버려야, 아시아 종교로 종북 통일전선전술을 쓴다는 분석이 가능한데, 이게 좌절되고 있다.
- 기독교인이 1000만이 넘는다고 쳐도, 아시아종교(유불선)영향자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정치는 대중득표와 관련이 있다. 좌파가 기독교를 외면하는 것은 그렇다쳐도, 보수마저도 예전과 달리 외면한다. 기독교 신앙의 시민윤리 측면이 정치 참여를 좋아하는 보수장년층 대중과 안 맞는 것만 띄운다.
- 6.15를 정당화할 때 쓰는 천도교 등 한국 新종교 용어의 전방위적 사용을 좌파 매체는 물론이고, 보수관련인사마저 착실히 침묵한다.
- 샤머니즘은 세속주의와 비 도덕주의를 취한다. 좌파가 이런 거 취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조갑제닷컴도 세속주의와 비 도덕주의를 일관한다. 따라서, 우리사회를 비 권위주의적으로 해결할 시민주체의 형성은 커녕 반대로만 흘러온 셈이다.
- 87년 이후 인문사회학 관련 엄청난 서적들에 철저하게 소외된 90년 이전의 공교육을 배운 세대들만의 보수정치 고집은 문제가 크다.
- 교파 교단 안에 갇힌 기독교 인식의 극복은 중요하다. (기독교 자체가 아닌 기복신앙에는 엽기적으로 너그러우면서, 정작 특정 교파 교단의 이해관계 사수로서 특정교리만 집착하는 건 뭘까?)
- 他종교와 시민윤리 안에서 협력 의식 배양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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