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우선 자유민주주의는 지배이데올로기였지만 동시에 대항이데올로기로도 기능했는데, 이는 첫째 반공반북과 국가 안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이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의 거의 유일한 기반인 상황에서 독재 정권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자원이 크게 제한되어 있었고, 둘째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가 실제로는 사상과 표현, 집회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민주주의적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배이데올로기와 현실의 괴리가 극명히 드러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말뿐이 아니라 원칙 그대로 실천하라는 담론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셋째 사회운동에 강력한 정치적 탄압이 대개 좌경용공 혐의를 심지어 조작까지 하면서 자행되는 상황에서 좌경용공의 혐의를 피하면서 독재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는 담론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김정한, 168)

 

http://deleat11.blog.me/220595557452

 

영웅주의가 규제되어야 법치주의가 살아나는 이유

-민주화 인문학의 90%가 사기다-

 

. 민주화 계몽주의 = 무교 영웅주의 규율권력

 

민주화 이후 대학가를 가득 메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 정치이론을 중심으로 반공계몽주의적 주체관을 해체하는 자료들이다. 정작, 민주화계몽주의를 해체하는 시선의 글은 아직 없었다. 이 글은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이론으로 민주화계몽주의 주체관을 해체하려 한다.

 

탈근대 정치이론은 서구의 근대적 주체관인 칸트自我觀을 해체한다. 탈근대적 주체관은 기독교적 가치관이 서구 이성에 개입돼 만드는 이분법 차원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한국근대의 전형적인 주체관은 무엇일까? ‘따라잡기 근대성으로서 상상 세계로서 서구 자유주의 질서를 생각하면서도, 생활 공동체에서는 적잖게 조선 후기 이래 누적된 사회문화 관습위에 서 있는 지평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겐 유교적 주체관에 서구 자유주의 문화가 상상적으로 덧씌워진 것이고, 어떤 이들에겐 무교적 주체관에서 머물러 있어 오게 됐다.

 

한국 근대 사회에서 大卒者들에겐 독특한 데카르트적 코기토 자아의식이 있다. 이의 이면에는 대학생으로서 자각이 선비로서 자각과 겹쳐지는 상태를 말한다. 학생운동이 종종 유교적 자아의식에서 민본의식을 따오는데, 이는 이러한 예에 해당될 것이다. 대학생이 흔해지기 시작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러한 자아의식은 대학 현실에선 소멸한다.

 

한국 엘리트들의 코기토적 자아의식 씨족 사회 연고주의와 연결되는 씨족형이상학과 연결돼 붕당적 배타성과 연결됐다. 자신이 나온 출신학교만의 독특한 편견을 마을주의로 공유하는 방식을 말한다. 한국의 학벌 사회에서 상층을 차지했다는 인식은 알게 모르게, 조선조 선비들의 상층 의식과 통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사고존재를 연결해주는 데 카톨릭의 을이 요구됐듯, 한국의 엘리트들에 사고존재를 연결하는 데에는 학연지연이 요구됐다.

 

반공계몽주의와 민주화계몽주의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같은 점이 있다면 일본 명치 계몽주의의 영향이란 것이다. 일본 명치 계몽주의가 아시아 생활공동체의식을 보호하기 위한 카피로서 서구 문화 도입을 말한다. 차이가 있다면, 반공계몽주의는 국가주도인데 반해, 민주화계몽주의는 엘리트대중의 결합단위가 주도가 된다.

 

반공계몽주의만 산더미 같은 분량으로 해체하는 논문이 제출되고, 민주화계몽주의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한국 대학가 학술문화의 건전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낸다.

 

한국에 잘 알려진 탈 근대정치이론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푸코의 규율권력’, ‘지식/권력’, 들뢰즈의 ()외디푸스를 들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는 국가가 국민의 무의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장악하고 있으니 이론적 계급투쟁으로 전복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무의식에서 지배한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담론이다. 국가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통해서 국민 무의식을 지배하기에, 계급투쟁은 그러한 기구들을 교체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그리고, 푸코의 규율권력지식/권력은 사회문화의 배치와 구도가 주체를 형성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인간의 자아는 사회적 존재로서 형성된다. 그 사회적 존재로 문화가 있고, 담론형성체로서 사회구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구조가 규율권력으로서 지식/권력으로 포진돼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 있으면 인간의 사고는 문화의 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 모든 곳에 분산돼 있기에 권력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들뢰즈의 ()외디푸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구현하는 칸트적 자아관이 외디푸스 심리학위에 있다는 전제를 제시하면서, 좌파적 해방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를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시민사회 질서를 가능케 하는 원형 무의식 구조를 돌파하자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외디푸스란 명제를 통해서 근대적 주체관의 심리적 밑둥을 바라보는 들뢰즈의 시선이다. 근대 시민사회 자아관에는 서구 중산층 가정의 심리구조가 원형적으로 자리했다면, 한국 민주화 계몽 자아관에도 원형적으로 자리하는 심리적 밑둥이 있다. 나는 그것을 영웅주의로 규정한다. 조갑제닷컴 조갑제기자는 이를 징기스칸으로 규정한다. 물론, 이는 정치세력에 따라서 김대중’, ‘노무현등 민주화 인사로 이름 석자만 말하면 주변에 대중 동원가치가 주어지는 이름으로 말해도 무방하다. 민주화 계몽주의는 마을주의차원의 씨족 추종자 공동체라는 이분화된 계급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민주화 계몽주의는 엘리트문화가 형성되는 학연’ ‘지연공동체와 관련된 씨족주의 문화가 밑둥에 자리하며, 이것이 영웅주의라는 지식형태로 표현돼 왔다. 영웅주의라는 신화적인 지식형태와 민주화 권력으로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화 계몽주의로서 영웅주의는 조선후기 이후에 무당들이 치뤘던 마을제사형식을 기초로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런 무교 제사 형태가 반만년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설()이 지배하며, 현재 국사학계의 지배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학설이 지배학설화되는 데에는 1987년 이후 민주화 권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배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서구 근대 계몽주의 자아관이 서구 중산층 가정을 모델로 외디푸스적 구조를 취했다면, 민주화 계몽주의는 무당 마을제사에서 무당들이 영웅(英雄)’을 내세우며 빨면서 자기만이 영웅에 접신(接神)할 수 있다는 주술(呪術)을 과시하는 장면이, 민주화 주체관의 심리적 원형이 된다. 接神할 수 없는 씨족 사회 노예 계층이, 그런 씨족 이길 구현하며 마을 과 접속하는 제사장에 실리적/세속적/공동체적으로 연대하는 구조가 민주화 계몽주의가 이루려는 원형 심리를 차지한다. 이런 구조는 근대 이후 대중사회가 엘리트에 의존하는 바탕 심리가 되기도 한다. 대중사회에서 엘리트의 전문지식은 무당의 주술행위와 차이가 없게 느껴진 것이다.

 

씨족 마을 제사는 지역 마을 어른(추장)을 중심으로 동심원적으로 뭉치는 구조가 많다. 이 구조는 마당놀이에서 공연자와 청중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굿판에서 무당과 청중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드러나는 유사한 형태는 잠실 야구장 치어리더와 관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권세를 독점한 무당, 공연자, 치어리더 등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혼연일체가 되지만, 정작 청중 서로간에 어떠한 관계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씨족 마을 별로 안과 밖이 나뉘며, : 보편성이 아니며

실리중심적이며, 세속적이고 : 도덕적, 관념적, 윤리적이 아니며,

마을 구성원을 씨족 신()이 포괄하는 구조를 취한다. : 시민상호주관성이 아니며, 관념화 형태로된 노예주의의 표현.

 

一君萬民 믿음은 씨족 마을사회에서 씨족 노예 수준에서 느끼는 군주제로 보여진다. 물론, 군주의 권력은 환상이나 상상 속이며 실제로 접하는 권력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마을 어른이 마을 으로 보충적으로 존재한다. 모두 英雄으로 드러난다. 이런 雄主義物我一體로서 대중들의 씨족 에 대한 同化를 전제한다. 그런 同化는 민중계급이 일상에서 쌓인 울분은 배설하는 효과로 나타난다.

 

서구 근대사회에서 공론영역에서 시민사회 다원성을 소화하는 것과, 씨족 안에서 여러 종교가 종합되는 것은 비슷해 보이기는 한다. 조선 왕조 임금은 유교의 각 정파의 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종교의 이었다. 동학에서 교주 안에서 儒彿仙 신앙의 종합이거나, 단군 신화에서 단군이 儒彿仙 종합이란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명백한 차이가 있는 데, 시민사회의 공론장은 투명하게 외부에 공개되는 데 반해, ‘巫敎안의 종교다원주의 요소는 씨족 과 귀족 간의 관계가 결정하는 공적 사안이 철저하게 은폐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영국 여왕체제의 서구 공론장 담론은 시민사회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에 여왕의 존재여부가 공론형성에 무관하나, 한국의 씨족 신앙에서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다원주의는 제사장해당 종교간의 개별적인 사적 관계에 의하게 된다는 말이다.

 

한국인의 심층 무의식에서는 전제군주에 복종 심리가 흔하다. ,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된 서구인의 정신분열증보다는, 편집증적 형태의 정신병리학이 일상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인에 욕망의 정치는 대부분 과거 어느 시점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한 편집증적 감정의 드러냄으로 나타난다. 자신들의 마을의 최고 이 몰락하는 것은, 마을 전체의 추락이면서 자기 명예의 훼손이 된다. 그렇게 영웅형상에 接神한 대중은 자존심 훼손이란 문제로 행동주의에 들어서게 된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에서 행동주의는 대부분 무교 영웅주의와 연결된 종교 인맥에서 드러났다.) 편집증 형태의 정신병리학은 박정희 시대부터 전두환 시대까지 덮여져 왔다. 그러나, 김영삼 이후 종교의 영웅주의 코드를 부활시키면서, 편집증 형태의 정신병리학도 같이 복원됐다.

 

舊韓末 애국시가는 모두 고종임금이 곧 조선이었다. 그 구한말의 고종임금은 親日, 친러, 친청파의 등살에 시달리는 약한 권력체였으나, 민중에겐 자신들의 존재성 전부를 설명하는 단위였다. 19193.1운동은 고종의 운지일와 연관된 독립운동행사였다. 그렇게 복원된 한반도 씨족공동체 중심으로서 독립운동움직임은 임시정부로 이어진다. 1920년대 조선학운동에서 단군신화의 단군부재하는 고종의 대체 차원이었다. 1920년대 좌우합작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런 씨족 신앙은 좌파 엘리트가 마을 으로 자기 우상화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두레주의를 결성하는 차원으로 드러난다. 그런 두레주의는 역사적으로 통일전선론으로 드러난다.

 

2차 조선공산당의 부설 홍보기구 차원이었던 KAPF의 대중화 논쟁 때 노동자 농민계급은 계급 사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 계급의 시점에서 계급주의와 연결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졌다. 이 대중화논쟁의 주장은 20년대 통일전선에 소설등에 나타난 英雄主義로 계급주의 운동을 펼치는 데 드러났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은 임시정부가 인민공화국 주권에 포섭되는 일이었다. 인민공화국 헤게모니가 중심으로 바라본 것은 김구가 아니라 김규식이다. 그럼에도 김구를 띄우는 것은 연석회의 이후의 큰 그림이 인민공화국 그림이었으면서도 임시정부 관계자를 간판에 내세우는 게 대중에 좋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김구는 안두희에 의한 테러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 무속신앙에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 사람은 巫敎 영웅으로 안착되기 쉬웠다. 대중들에게 불쌍하다는 연민의 감정이 결집되는 것이, 대중들의 感情移入을 쉽게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해방공간 남로당 주도 인민공화국에 가입한 남로당원의 절대다수는 문맹이었다. 공산당 이념을 알거나 알 수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로당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남로당의 정예간부에 움직일 수 있는 바탕 신앙이 존재했기에 그러하다. 한국 종교 안에 있는 巫敎주의가 이를 대변한다. 1920년대 카프 대중화 운동 때부터 존재한 계급주의와 문맹 농민간의 매개고리로서 한국 민중신앙인 것이다.

 

물론, 고종은 유교를 체제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의 임금이다. 대한제국을 통해서 드러내려는 것이 역사적으로 고종이 드러내려는 이념이었다. 이를 계승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면서 대한민국 국호에 담겨 있다. 반면에, 민중계급에 고종은 무교적 씨족 다름 아니다. 세속적, 실리적, 현세적 차원으로 고종은 특정 마을이 의존할 대상이 됐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고종은 조선왕조를 巫敎적으로 바라볼 때 가치관에 가깝다.

 

반공계몽주의와 민주화 계몽주의는 같은 부분이 있고, 다른 부분이 있다. 반공계몽주의와 민주화 계몽주의는 모두 명치 계몽주의로서 보호될 아시아적 공동체관을 위한 카피 문화로서 서구모방을 추구한다. 반공계몽주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일본의 중앙권력과 겹쳐서 보는 차원이 중심이 되는 입장이지만, 민주화 계몽주의는 엘리트가 감정을 북돋워 만든 대중결집체가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반공계몽주의는 國家觀이 중시됐다. 공동체관점 안에서 을 넘는 행위에 상호 규율이 강조됐다. 반면에, 민주화 계몽주의 안에서는 일군만민 영웅신앙이 강조됐다. 일군만민 영웅신앙은 대중의 감정을 북돋와 권력을 모아 이익을 보려는 엘리트들이 주입한 이데올로기였다. 한국은 칼 마르크스 기준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사회다. 씨족 노예제 사회다. 심층 무의식에 노예제 코드가 있다. 영웅신앙은 그런 노예제 코드를 활용하여, 엘리트가 질하는 정치다. 반공계몽주의가 투철한 국가관을 중시하는 반면, 일군만민 영웅신앙은 연고주의’·‘혈연주의 의식이 지배하고 서구 근대적 합리 이성은 배제된다. , 무정부주의적 민족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가 신채호는 단군신앙인 대종교인이면서 무정부주의자. 씨족 을 향한 노예들의 우러르는 감정이, 존 로크의 통치론· 홉스의 리바이어던·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대체하는 것처럼 논해지는 것이다. 전제군주기계로서 지역 통치자와 노예들의 계약은, 근대 국가로서 사회계약이 아니다. 그러나, 민주화 계몽은 엘리트에 接神한 대중들의 수동적 감정이 서구의 사회계약론에 준하는 시민의 공적 감정의 드러냄인양 왜곡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북연석회의 이후 대한민국 통일전선주의를 기억하는 엘리트층의 일군만민 영웅주의, 일반대중의 이승만 건국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실체성 모두를 인정하는 차원이 병존했다. 반공시대 한국사책은 대한민국은 적화 위기 및 혼란 탈피로서 國家요구였고, 민주화시대 좌파 역사책에는 미 군정의 주도성이 이승만 단독정부에 손을 들어준 차원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가 됐던 6.25 전쟁과 더불어 국민들에게 國家의 소중함의 마음 깊은 동의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 영미 자유방임주의나 유럽 사회주의 탈을 쓰고 나타난 일군만민 영웅신앙

-민주화 주체성은 로나 로나 종교 코드 강제 퍼먹임의 부산물-



민주화 이후 두 개의 담론이 대학가를 지배했다.

 

하나는 영미 자유방임주의로서 시장정부란 이항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사회주의로서 민중국가란 이항대립이다.

 

이 둘의 배후는 모두 一君 萬民 영웅신앙이 자리한다. , 종교 코드를 기독교에 담으려고 하는 하나의 정치패거리 집단이, 두 패로 나뉘어서 활동했다고 보는게 적절해 보인다.

 

영미 자유방임주의는 세계 최강의 시민계층은 앵글로 색슨 민족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움직인다. 자유방임경제는 영미 청교도중심의 장로교 역사와 관련이 깊다. 그런 기독교 시민층을 바탕으로 한 자유방임경제가 가능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시민사회에 누적된 시민도덕을 말한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 경제학자만이 다루는 무당의 자기들의 에 가까운 呪術적 존재로 설명됐다.

 

원래, 개신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분리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개신교는 교회연합 질서로서 국가됨에 참여한다. 개신교 국가는 교회연합질서의 세속화 차원의 연방주의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독교국가에서 개신교의 국가로부터의 분리가 무정부주의로서 분리가 아니다. 기독교 시민으로서 신앙을 누리기 위해 분리다. 반면에, 민주화 이후 자유방임주의는, 국가만 빠지면 자신들이 이라는 취지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미 자유방임주의가 기독교 신앙 특유의 분리주의와 연결되지만 철저한 도덕경제인데 반해, 한국의 자유방임주의는 재벌을 뒤 봐주는 도꾜대 관료가 민간으로 옮겨 뒤 봐주는 것을 카피하여, 서연고 출신 경제관료가 민간으로 옮겨 재벌을 뒤 봐주는 것을 말한다.

 

영미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주의를 이루는 기초로서 법치를 강조한다. 法治는 유대교 자연법을 기반한다. , 시민사회 쌍방 모두에 공통요소로서 유대교(구약성경)의 세속적 표현으로서 을 말한다. 반면에, 한국의 자유방임주의는 재벌에 유리하게 입법되는 차원의 法治를 강조한다. 서구 자유방임주의문화를 카피했지만, 法治를 논할 때 아시아의 법가적 관점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영미 자유방임주의는 法治에 도덕이 함께 움직이지만, 한국의 자유방임주의는 法治에 도덕이 붙지 않는다. 한국 자연법은 ’-‘동생나누는 그런 마을 공동체 논리를 말한다. (그 안에 노예제 삶의 코드가 연결되었다) 이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한국 자유방임주의는 민주화계몽으로서 명치계몽주의의 서구 문화 카피주의주체성 속에 있다는 차원으로 말이다. 아시아 생활 세계와 서구 문화 카피의 연결이 매우 불안정하며 형식적이다.

 

기업에서 근로자를 대상으로 기업 오너는 神的인 존재다. 그리고, 그 존재성은 근로자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인맥망을 통해서 신비화된다. 일종의 씨족 으로서 대기업 오너는 매스미디어 및 파벌정치와 짝짓기로 존재한다. 그들이 의존하는 최종 대상은 파벌정치 특정 계파다. 군사정부 정경유착이 國家였다면 파벌정치 특정계파로 위치만 바뀐 셈이다.

 

영미 자유방임주의의 자생적 질서는 기독교 인본주의 차원에서 시장경제를 바라보는 어떤 시각을 반영한다. 경제적 진화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 시민이 인본주의 차원의 自然으로 움직이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에, 한국식 자유방임주의는 老子無爲之治를 의미한다. 종교의 無爲而化를 의미하기도 한다. , 시장의 으로 존재하는 이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서구 헬레니즘 인본주의 영향과, 노자의 自然主義는 완전히 다른 사고다. 이 둘이 같다고 말하면,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논하는 발가락 닮기 수준일 것이다.

 

한국식 자유방임주의는 사상의 자유시장으로서 공론장 대신 엘리트의 육체성이 공적 영역을 대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엘리트는 매스미디어와 파벌정치에 연결된다. 그런 연결을 이어주는 고리는 이다. , 공정한 조건은 온데 간데 없이, 더 나은 물질이익을 원하는 대중들에 경제엘리트는 呪術을 구사하는 경제무당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시민사회 도덕경제의 신뢰 때문에 규제가 아니라, 시장 질을 도와주는 것이 경제의 파이를 키우고 그것을 통해서 성과를 나눈다는 관점의 규제다. 시장주체들에 도덕교육이 거의 논해지지 않고 있기도 하다.

 

교과서 자유민주주의를 배운 사람은 대기업 갑질주의의 현실 상황인데도, 이것을 교과서적 자유민주 상황인 것으로 상상적 동일시를 취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대한민국 체제인 자유민주 믿음을 위해 현실 생활의 아픔을 감내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현실 상황에서는 아픔을 참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식 자유방임주의와 무교 영웅주의의 만남은 조갑제닷컴에서 조갑제기자 글쓰기를 통해 대거 만날 수 있다. 한국식 자유방임주의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서 형성된 음지를 창출하고, 그에 의한 국민소외감정을 크게 창출한다.)

 

유럽 사회주의를 수용한 진보 담론은 국가민중이란 이분법으로 국가를 취한다.

 

국가를 넘어서는 어떠한 정치공동체를 논한들, 한국 좌파 논의는 그것을 수렴시키는 엘리트로 향한다. 그리고 그 엘리트는 매스미디어파벌정치와 연대한다. 그리고, 그 엘리트는 파벌정치와 미디어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돈으로 움직인다.

 

소수자를 논해도, 다양성을 논해도, 여성성을 논해도, 다원성을 논해도, 공정성을 논해도, 그 어떠한 진지한 가치를 논해도 모두 결론은 다원적 주체의 공적 토론 대신에, 공적 가치는 좌파 파벌 엘리트로 수렴한다.

 

유럽 사회주의는 배경 종교로서 유대교를 취한다. 유대교는 국가없이 존속한 유대민족 종교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양식이 초래한 유대성이 강하다. 반면에, 무교 취향의 종교는 민생의 파탄상황에서 망국을 바라면서 자신만이 살기를 바라는 차원인 정감록신앙에 기초한다. 대성은 연고주의와 가족주의를 넘지 못한다. 유대교의 유대성과 종교에 내장된 마을 내부의 서로가치는 같을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유럽 사회주의 정치이론을 道敎로 읽자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학술논문을 만난다. 한국인에 道敎종교를 통해서 구현되니, 유럽 사회주의 정치이론을 한국 좌파는 종교로 읽어왔던 셈이다.

 

(이슬람 할랄 식품 문제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상당히 아쉬운 점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법치주의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라는 특정 신학대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인식의 틀은 예수를 안 믿는 다수 국민들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기독교 신자 600만의 단결을 취하며 나머지 인구를 거부반응을 만든다는 말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법치주의 차원에서, 한국 국민에 유대교 법인식이 존재한 적 없기 때문에 이슬람 할랄 식품 문제는, 생활공동체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巫敎 차원으로 해석하면서 한국에 도입한 엘리트로 수렴되는 구조를 취하기 쉬운데, 그 엘리트가 북한 체제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경우, 할랄 식품 인증은 대한민국 영토내에 세계 최강의 폭력 행위집단인 IS를 북한체제를 위해서 작동하게 허락하는 경우일 수있다.

 

세계화. 혹은 글로벌 스탠다드란 이름만으로 따라잡기식 유럽 정치 모방은 이젠 집어 치워야 한다. 국민 다수가 공포감을 느끼는 이슬람 문화 도입을 인위적으로 추진한들, 한국이 유럽사회가 될 수가 없다.

 

한국의 다민족주의는 좌파 엘리트로 수렴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구현양상은 대한민국 공동체성의 쪼개기로 드러난다. 정말로 일반국민 대상으로 다수파를 확보하여 이슬람의 그 문화가 못 오게하는 국제적 정당성을 찾으려는 것과, 특정 신학대 이익과 일반이익을 동일시하여 나머지 국민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은 다르다.)

 

 

결국, 민주화 이후 한국의 경제와 정치는 이렇게 요약된다.

 

상상세계로서는 서구 영미 자유방임 경제학, 혹은 유럽 사회주의의 작동처럼 보이지만, 현실 세계로는 둘 다 모두 종교로서 영웅주의 취향으로 파벌정치 홍보기구: 매스미디어 (혹은 그 꼬랑지로서 시민단체) 전문 엘리트 으로 연결. 이런 모양새를 취한다. , 상상세계로서 대중에 보여주는 이미지 정치 쑈로서만 시민민주주의와 시장자유주의가 있었을 뿐이며, 대중 사회 속은 그다지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국가’ ‘통치자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권력집중을 부정한다. 군사정부 때 국가를 기준으로 권력집중을 했다고 비판한 민주화 계몽은, 英雄主義를 매개로 국회를 근거한 파벌정치-매스미디어-전문가 집단의 아시아식 짝짓기 연합정치 중심의 권력집중을 옹호한다. 민주화 계몽 담론은 국가권력에 대한 부정을 반복한다. 민주화 이후 입법된 법조문은 국가권력 과잉에 대한 방어조문이 많다. 그런데, 그 법조문들은 엘리트의 갑질 과잉에 대한 방어조문은 눈씻고 봐도 거의 찾기 어렵다. 입법행위를 통한 특정 파벌 엘리트들의 이기주의 구현일 뿐이고, 보편타당성과는 거리가 있었던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의 세속화 버전인 영미 계몽주의를 사용하되 종교로 읽고, 유대교 메시아주의 차원의 유럽 사회주의를 사용하되 종교로 읽는 연합권력이 민주화 이후 지배했다는 이야기다. 민주화 인문학은 이런 차원에서 자신들이 포장하고 싶은 상상세계를 확장하는 계기로 사용됐다.

 

원래의 기독교 계몽주의와 유대교 계몽주의가 적용됐을 경우는 法治主義가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 자유방임경제학을 다룬 논문이나 유럽 사회주의를 다룬 논문에서 노자 장자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본다. 신문기사에서도 이들을 도교 관점에서 소개하는 글을 본다. 노자가 공자를 공격하는 시점으로, 현존하는 법질서를 간단히 무시하며 그런 취지로 감정을 응집하는 세력 결집의 글쓰기를 보인다. (물론, 입법이 되지 말아야 할 악법이 아니라, 비례성과 보편성을 갖춘 준법행위가 마땅한 정상적인 법조문들의 이야기다.) 道敎가 떴을 때 중국에선 무수한 王朝가 몰락했다고 한다. 法治主義가 조롱받는 국가는 없다.

 


. 민주통일담론은 존재한 적 있는가?

(자유민주주의자의 관점에서 고찰)

 

헌법은 통일방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말한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통일담론은 모두 종교 영웅주의로 점철됐다. 현재 세상을 종교 교리의 先天세상으로, 그리고 통일세상을 후천개벽 세상으로 바라보는 취지가 반복된다. 조갑제닷컴 및 보수논객들이 자유통일이라고 말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단어를 회피하는 것은, 종교 관점을 보수지지층 허락 안 받고 끌어들이는 의도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경제담론이 市場을 논하지만 엘리트-미디어-파벌정치로 연결하고 진보정치도 마찬가지이듯이, 통일담론은 처음부터 파벌정치 보스를 대중들의 속을 풀어줄 무교 영웅으로 포장하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들이 전문지식으로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영역일수록 엘리트 의존증이 심해지는데, 통일담론에서는 의존치가 최대치로 드러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본디 기독교에 기반된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사회질서를 말한다. 헌법의 입장은 남북통일을 法治主義가 근간이 된 성숙한 시민사회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은 一君萬民 차원의 英雄主義가 반복되고, 그 차원에 연결된 엘리트의 통일전문가라는 이 벌어지고 있다. 법치주의 기반 성숙한 시민사회와 파벌 정치와 연결된 엘리트연합의 담합은 전혀 별개의 것이나, 두루뭉수리 같은 것인양 논해지는 일이 길어지고 있다. 무수하게 인문학 정보가 늘어난 민주화 이후가, 군사정부 때보다 오히려 더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대중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통일세상은 후천개벽세상이기에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엘리트는 그런 대중의 열망을 받아서, 기업 요소 요소에 사회체제를 변동할 수 있는 전문 엘리트 행동가를 배치한다. 일반국민의 몫은 통일담론에 깔린 종교 마인드에 같이 들떠 주는 차원에 가깝다. 종교를 국가신앙처럼 허락없이 만들고, 그 차원에 종속된 핫바지로 국민을 설정하는 것이다.

 

통일세상은 후천개벽 세상이기에 복지선진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취지로 엘리트는 대중의 열망을 받아서, 복지를 추구하되 그 요직 부서에 전문 엘리트 행동가를 배치한다. 엘리트의 복지주술행위를 위하여 일반국민은 정말 담세의 의지에 대한 동의확립 과정이 회피되는 경향도 존재한다.

 

(보수 장년 엘리트들은 현 서울시의 마을 프로젝트는 요소 요소에 진보적 조직행동가를 배치하는 행사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통일세상이라고 바라는 기대치로서 당위형은, 종교인이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일반국민에겐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북통일은 서로 다르게 살아온 주체간에 계약주의를 통해서 만나는 소통의 과정이라는 헌법조문의 전망과는 전혀 별개로, 남북통일이 종교 후천개벽 비전의 구현이란 차원으로(믿지 않는 이들에겐 종교폭력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그런 차원이 구현되기 위한 갖가지 조건이 실현되는 것이다. 英雄이 통일주술을 내리며 그 조건으로 주어지는 비용은 날로 늘어나고, 그 차원으로 英雄에 줄 선 엘리트의 이익행위는 늘어난다.

 

남북한 주민이 공정한 상태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상태를 추진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에 종교 유토피아를 문화를 통해 주입해서, 한국 국민으로서 국민의식의 물이 빠지면서 민주화 엘리트들의 권력이 아주 강력하면서 비대해지는 과정을 통일세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대한민국 역사교육을 소외시킨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한 역사를 높인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대한민국 부정파들의 입장에서 대한민국 형성사를 해체하는 시점이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는 사안이 소멸되는 취지를 지향한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종교 특유의 감정으로 현실의 붕괴를 감춰지는 것을 추구한다.

 

물론, 민주화 이후 反北 지형인 조갑제닷컴 쪽도 문제는 동일하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바른 역사관을 이야기하지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기초적인 법치주의를 논하고 있지 않다. , 정확하게는 영웅담론에는 法治主義가 설 수 있는 서구 정치철학이 장착되는 게 불가능하다.

 

좌편향 교과서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국민으로서 무의식형성의 교체를 추진하는 의도로 나타났다. 실제로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좌파 잡지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이론과 관련한 글이 많이 실리고 2003년 쯤 교과서 교체가 추진됐었다. 조갑제닷컴은 정경희씨의 주장을 받아서 좌편향 교과서가 북한역사책을 표절했다고 몰아간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갑제닷컴은 한국사 국정교과서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인정을 전제로 존재하는 법치주의와, 그것을 불인정하는 이들에게 존재하는 一君萬民으로서 영웅과 그에 연결된 이란 無政府主義的 民族主義의 병존 상황이 계속됐다. 남북한 한반도 및 해외에 퍼진 민족에 接神가치가 있는 영웅의 씨족 혈연공동체가치가 國家라는 종교 특유의 신앙을 전제로 하며, 대한민국 국가가치를 무시하며 존재하는 일군의 집단이 있다. 그런 마인드 안에서 북한측과 통일전선전술이 벌어지기도 한다.

 

6.1510.4등 좌파적 통일안은 한결같이 종교 취향의 무정부주의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며, 한국인에겐 무정부주의 상태를 옹호하는 유전자가 있으며 그것을 추진해야만 한다는 편집증적인 믿을 추진하는 일군의 행동세력과 함께 존재한다. 그 주장은 결국은 북한측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남북한의 공정한 조건으로 사회계약주의를 창출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남한인 대한민국 영역을 국헌문란적인 문화 무정부 상태로 궤멸시키면서, 국민대중을 파이당근으로 북한방향을 선망하게 하다는 전략이다. 이는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할 때 썼던 방식 그대로.

 

영웅주의란 지식형태는 무정부주의적인 신종교 종교규율과 연결돼 왔고, 조선후기 이래 도교 민간 신앙에서 동학운동을 거치고, 20년대 이후에 좌우합작 정치에 문맹 농민과 공산당과 매개 형태 문화로 존재했다.

 

물론, 반북 영웅주의도 존재한다. 조갑제기자의 징기스칸이 그 예다. 그러나, 조갑제기자의 징기스칸 글을 봐도 드러나지만, 도교 환타지 측면이고 법치주의가 설 땅은 한 뙤기의 땅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갑제 기자 자체가 배운 지식층이 드물 때 당시에 형성된 주체관을 갖고 있다. 더 많이 지식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허술한 논리인데도, 그는 대중들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시대착오적 착각이 확신적으로 갖는다. 그가 보여주는 징기스칸 담론은 전제 군주 차원이 비용효율성을 일으킨다거나, 아니면 민담 무교 영웅의 통과제의처럼 이유없이 수난을 겪지만 마침내 성공할 것이란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이런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 보수세력은 희생돼 온 가치가 너무 많다.

 

1960년대 대학가 운동권들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통해서 참여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60년대 당시는 대자적 의식의 로 복귀하는 의식은, 종교의 참나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대학생 신분을 선비와 동일시한 자존의식으로 읽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 제도권 엘리트 최연장자층인 세대부터가 한국 사회의 자유민주질서가 조화롭게 이뤄지는 균형을 잡는데 실패해오고 있다. 종교식 자아의식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착각한 장년층은 연고주의를 통해서 권력을 과시하게 되고, 국가 공적 가치는 분해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 돌아간다.

 

 

. 국민은 유교자본주의로 강력한 대통령제를 하고 싶은건가, 아니면 시민민주주의로 법치주의 구현하고 싶은 건가?

-영웅주의가 숨겨온 진실-

 

국회는 매일 혼란스럽다. 국회를 책임지는 분은 대통령이 호소하는 법안을 둘러싸고, 이건 니 법, 이건 우리법, 이런 식의 구분을 짓는다. 보수정당 대표란 분은 매일 한결같이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치받는다. 바라보기 짜증날 지경의 상황인도, 언론은 이를 비호하기 바쁘다. 이들 파벌에 줄 선 미디어 뿐만 아니라, 네티즌 몇몇은 낯뜨거운 글로 인터넷 공간을 채운다.

 

일군만민 영웅주의에는 理性이 없다. 지방자치 구현은 각각이 사림파 지역 지배처럼 독립을 주장하고, 비용은 일제히 중앙에 청구한다. 상식적으로 중앙은 그 비용을 견뎌낼 수 없다. 그러나, 무교 영웅주의는 그것을 견뎌야 능력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 유능은 정부 세금에 의존하여 뜯어먹는 부패한 엘리트의 기준이지, 보편적 잣대는 아니다. 그러나, 그 엘리트의 잣대에 일반국민이 포획디기 쉽다.

 

강성노조는 자신들의 투쟁을 정부는 당연히 품어준다고 본다. 역시, 종교 일군만민 영웅 가치를 갖는다. 이런 것들을 전부 조화주의로 나열시켜 품지 못하면 엘리트가 무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그렇게 엘리트가 대중들에 숨어서 무교주의로 정부 재정을 뜯어내는 차원을 견뎌낼 정부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군사정부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을 지킨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민민주주의 도덕질서로 을 지킨다는 것도 아니다. 잘 지켜보면 알 수 있듯이, 배설감을 끄집어내서 대중들이 서로 싸우게 하고 피곤해 지치게 만드는 전략이 지배전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신적 기원인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문화정치 분열주의 지배전략을 일반국민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부 중앙을 최소화시키고, 그리고 각 엘리트들에겐 에헴할 수 있는 최대치를 몰아주고, 시민사회적으로도 서열주의의 상층을 차지한 이들에 못하게 되고, 정부는 축소시켜서 못잡게하는 구조로 돌아간다. 이는 군사정부 때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 숨어서 존재하며, 한국의 정치와 언론 엘리트를 배후조종해서 빚어진 것이다. (이는 결코 일루미너티 등의 과잉수사로 표현돼서 안된다.)

 

민주화 계몽의 실체는 결코 일반국민이 느끼기에 보편타당성이 없다. 특정 배후 연고세력들이 영웅주의를 내세워 자신들만 이익을 누리고, 일반국민은 소외되는 차원을 강요한다. 그런 무교주의 기반에 현란한 서구 정치철학용어를 덧 씌운다. 아시아주의와 연결된 한국 배경신앙을 서구 엘리트는 알 턱이 없으니, 한국좌파 엘리트가 불러주는 데로 복면복창하기 쉽다.

 

민주화 계몽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의제화되는 적이 없다. 민주화 계몽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빙자한 자유방임주의에도 종교가, 유럽 사회주의 정치철학을 논할 때도 종교가, 그리고 좌파통일담론에도 종교가, 좌파 항쟁 기념일에도 어김없이 신문기사에는 종교 교리가 도배됐다. 그러면서, 민주화 이후에는 보수기독교에 정당하지 못한 이유의 맹공격이 빚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기구를 이용하는 한국 wcc 조직의 엘리트층에 종교가 포진돼 있다는 말이 된다.

 

1950년대에 YMCA를 중심으로 함석헌이 기독교를 종교식으로 해석하는 강좌를 벌였다는 말은 반론이 될 수 없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선비 붕당의 문제처럼 어떤 역사적 공간에 형성된 성경의 성서적 해석을 전 국민이 수용하는 것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강요가 통일 담론 등 국민 일상과 밀접할수록 더욱 아닐 것이다.

 

헌법학자 주류파벌들은 헌법학원론을 사회계약주의에서 찾는다. 그런데, 조갑제기자는 이승만을 우상화 시켜서 정당화하려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조갑제기자는 용비어천가 수준의 왕조주의 신비화담론도 아니다. 법가적 법치로든 서구적 시민법치로든 어떤 법치도 서지 못하게 하고, 할아버지 장년층대중이 기억하는 법실증주의 수준만이 이뤄야 할 전부처럼 주장한다. 이런 가치관은 새누리당 소속 정치인 뿐만 아니라, 새밑련 소속 정치인에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은 입법부터 보편타당성 대신 연고세력의 만족을 목표로 시작하는 게 많아졌다. 그런 연고층에 만족은 정치인 英雄主義와 연결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6-10)


지금 국민들은 국회의 유력 정치인의 자의적 행동에 불만이 누적됐다. 이 치유를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이 원하는 것인지 의견이 모여져야 할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제 복귀인지, ‘시민민주주의 도덕질서 확장인지를 논하지 않고, ‘배설감자포자기 상태로 먼저 엘리트들이 유발한다.

 

이는 법치주의 질서 및 공적 가치관이 국민들에 많이 잊혀졌다는 것을 엘리트들이 악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국정교과서 한국사가 집필되기도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엘리트가 규제돼야 한다. 엘리트가 규제되기 위해서는 엘리트의 권력 과잉을 규제하는 지식/권력이 규제돼야 한다. , 영웅주의가 규제돼야 법치주의가 살아난다.

 

한국은 1987년 이전에 유교적 합리주의 배경의 자유민주주의와, 무교적 영웅주의 기반의 자유민주주의가 대립했다. 지금, 문화 지배를 통해서 합리적 사고의 자유민주주의 기제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엘리트의 이기적 탐욕으로만 끝나도록 하는 문화조작이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보수논객들이 이를 바로 지적하고 있지 못하다. 조갑제기자의 징기스칸 영웅주의 자체가 그런 큰 틀의 문화조작의 일부로 비춰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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