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공공신학을 무속신앙에 비벼서 사용한 것에 회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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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전통적인 교회는 '계시신앙'위주로, 이성을 배제하고 율법주의를 극복하는 성향으로, 세상에 분리된 교회를 추구한다. 반면에, 근대 계몽주의 이후 교회의 세상참여를 중시하는 공적 신학을 중시하는 교회는 영미권에서는 신앙의 개인화를 극복하는 차원으로 형성됐고, 독일사회는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공공신학은 흔히 바르트, 본회퍼, 몰트만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논해진다.
⑵ 전통적 삼위일체는 세속적 군주권에 대항한 개신교 교파 교단의 교권을 강조하기에 적절할 수 있는 군주적 삼위일체 관점을 취한다. 두왕국론에 의존한 전통적 삼위일체신앙은 세상과 분리된 교회를 지향한다.
사회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영적 공간과 세상 모두를 통치한다고 바라본다. 통전적 신앙을 지향한다. 성령의 순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통한 메시아 신앙과, 예수 중심의 집단인격으로 드러나는 교회공동체의 세상참여의 순환으로 드러난다. (세상참여 신앙을 주장하며, 풀림으로서 행동과 맺힘, 얽힘으로서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무교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균형잡힌 기독교 노선은 사회적 삼위일체를 주장하며 특정교회 파당성의 아전인수로 빠지지 않게, 성서적 신앙으로 제한하는 차원의 복음선교를 중시한다는 주장이다.
⑶ 서구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구약성경 유대교 종말론의 영향을 입었다. 무신론적 사회계약주의인 루소나, 유신론적 사회계약주의인 홉스나 로크도 마찬가지다.
자유방임경제학의 아담스미스는 구약학 교수였다. 공정한 관찰자를 주장하며 법치를 논하는 자세는, 구약성경에서 본 계약적 관점을 그리스 인본주의로 풀어낸 것이다. 이런 아담스미스의 자세는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과 일치한다.
반면에, 민주화 이후 보수진영에 담론의 주도성을 가진 조갑제기자에 의해 주도되는,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혼자 한 것 같이 몰아가는 것은 헌법의 'ㅎ'자도 모르는 오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통전적 신앙으로서 이성을 논하는 차원도 유대교 종말론과 연결된다. 몰트만은 분명히 자신의 정치신학의 토대를 사회계약주의에 있다고 지적한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즉 통전적 신앙으로서 유대교종말론에 얽힌 인본주의 요소를 예수신앙적으로 바라보며, 처음부터 성도가 예수 안에서 하나이자 여럿으로 연결돼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단순한 아시아 마피아로서 붕당자체를, 성리학 도덕이 아닌 기독교도덕으로 포장해주는 증세가 강하다.
여기서, 그리스 인본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그런 메시아 소망에 의해서, 유럽시민사회에서 사회를 조이는 성향이 있는 수준의 유럽 사회주의와, 한국의 무속신앙 지평에 존재하는 마을주의로 공산마을이 아니면 '아작을 내버리는' 한국사회주의가 뿌리부터 다른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주의는 타자를 인정하는 유럽형은 들어오지 않고, 군주제 독재형인 레닌 스탈린 김일성 유형만 강하다. 설령, 민주화 이후 유럽좌파 노선을 수입하더라도, 유럽사람의 인간성은 못닮고 무속적 자세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⑷시민적 공공성과 무속에 비벼 먹는 한국식 공공성은 다르다.,
시민적 공공성은 이성을 중시하고, 협력관계를 중시하고, 서구 인간형에 깔린 무역사회가치를 중시한다. 반면에, 한국적 공공성은 감정을 중시하고 정착 마을편파주의를 중시한다. 즉, 연고가 닿는 마을 사람은 무죄, 아니면 유죄를 취한다. 또, 한국식 공공성은 마을주의라는 파당성에 공공성자체가 와해되기 쉽다.
㈀ 강성노조는 사회에 손상감정을 내세워 피해자인척 하며 공익을 나몰라
㈁ 대기업은 사회에 손상감정을 내세워 피해자인척 하며 공익을 나몰라
㈂ 언론은 사회에 손상감정을 내세워 피해자인척 하며 공익을 나몰라
㈃ 지자체는 사회에 손상감정을 내세워 피해자인척 하며 공익을 나몰라
㈄ 민주유공자 등은 사회에 손상감정을 내세워 피해자인척 하며 공익을 나몰라
마을중심 파당성에 공익을 사고못하고, 이익은 마을이 나눠갖고 피해는 상위 정치인 '임금'탓하는 관성이다. 이런 책임전가 악무한에서 절망하여 나자빠진 사람들의 숫자만큼, 민주화 지배권력은 권력 안보(?)를 누리게 된다.
한국의 공공신학은 오히려 파시즘 체제의 게르만 신화 이용처럼 한국신화를 이용하는 대중심리 조작현상과 닮았다. 즉, 대안임을 내세우는 지평자체가, 극복해야 할 퇴영적 사태를 닮아 버린 것이다.
⑸ 공공(공적) 신학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서 세상참여교회는 붕당 서원정치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악습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논해져 왔다.
⑹ 민주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대한민국 국가계약을 무효화를 주장한다. 그 배경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남북연석회의'까지 참여했다가, 그 이후 이승만 정권에 협력했다가 50년대에 반대로 섰던 인맥 집단이 담겨 있다고 보인다. 그들 중심의 이해관계로서 자신들만 피해자 감정을 주장하는 지평에, 국민 기본권의 온전한 배려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한국 사회의 공적 신학이 특정 세력에 권력 모아주는 감정의 정치이듯, 공적 신학의 외투를 쓴 통일신학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대한민국 건국계약을 사회계약주의로 설명하면서, 건국계약 무효를 주장하는 87년 6월 체제의 사회계약주의 미달 현상을 지적하는 게 타당하다. 모든 계약은 투명하게 쌍방이 아는 용어로 돼야 한다. 민주팔이만이 종북혁명 의도의 전제를 알고, 일반 대중은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형성된 계약은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된 수준만이 민주적 적격성이 있다.
⑺ 교회의 세상성은 몰트만 신학의 전제처럼 사회계약주의(구약성경의 메시아 소망)에 서야 한다. 반면에, 물질 중심의 샤머니즘 무속신앙에는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기독교 이외의 他종교는 구약의 메시아 소망에 준하는 차원에 가깝게 적응시켜야 한다. 즉, 어떤 종교 집단도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회피하는 갑질 상태를 누릴 수 없게 해야 한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집단인격의 공공성은, 결코 특정인의 방대한 교양지식으로 동일시돼서는 안된다. 그럴 때 권위주의 정치를 부활하지 않는 한, 오류가 자율교정되지 않기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국가로부터도 민간으로부터 오류가 교정되지 못하는 차원으로 많이 진행됐다.
87년 6월의 민주화체제의 부적합성은 온 국민이 피해를 누리는데, 그 연합세력의 이익을 위해 너무 값싸게 보수정부 탓으로 몰려지고 있다. 또, 대안을 내세우지 못하는 관료의 무능함이 좌파틀을 억지로 계승한 현 정부의 한계를, 민주팔이 설계제도의 한계면서 보수이념의 한계처럼 몰아가는 논리를 허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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