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보수교회는 어디 갔나요?
교회사는 88년 KNCC 선언에 맞서서 ‘한기총’을 세웠다고 말하지만, 지금 사실상 KNCC 선언에 포개지고 있음을 성도들에게 잘 알리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한기총’의 출범은 민중신학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요, 그 저항은 ‘칭의’교리와 밀접한 상관이 있다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치유’ 타령에 덩달아 ‘칭의’교리가 몰랑몰랑해졌습니다.
보수교회 다수파인 분리주의 성향의 근본주의 믿음은 ‘성령’과 ‘공리주의적 이성’ 결합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 합니다. 대각성운동 때의 성령체험의 계승을 지향하며, 공리주의의 신앙침투를 허락하느니‘분리하자’는 입장인 것입니다.
반공주의를 주도한 보수교회 다른 쪽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이성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중심성을 분명하게 세웁니다. 앞서 보수교회 다수파와 다른 계기는, 교회의 반공자유민주 수호의 사회적 책임을 복음수호와 동시에 전제하는 것이죠.
이와 전혀 다른 87년 이후 한국 사회 甲이 되는 신앙 체계가 존재합니다. 노자 장자의 ‘道’를 하나님으로 보는 믿음입니다. 이성에 얽혀지기도 하고, 영육일체 체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맘대로 믿음’입니다. 심리학계에서는 무의식은 자기 뜻대로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음란한 영화 연속 3편을 보고 그날 밤에 무슨 꿈 꾸는지. 반드시 그런 꿈 꿉니다.) 보수교회 출석중인 사람의 분석임을 감안하고 들으셨으면 합니다. 이런 신학은 민족해방 좌파 전술을 고정 베이스로 깔고, 기독교 신앙은 군더더기로 비춰집니다.
1988년에 분명히 보수교회는 이런 신앙에 저항해서 ‘한기총’이란 별개의 단체를 차리기도 했습니다.그러나, 흐르고 흘러서 한기총은 부패한 방석 감투 대결장소가 되다가, 분리됐다가 다시 통합됐지만, 88년 보수교회는 사라진 것 같네요.
물론, 보수교회 다수파도 자신의 믿음을 ‘복음’이라고 그러고, 다른 파도 그러고, 민중신학 추구 교회도 그러할 겁니다.
최소한 보수교회에서 ‘복음’중심을 말할 때, 65년 붕당망국론을 극복하자는 김활란씨의 주장에, 다수 보수교회 지도자가 협력해서 생긴 그런 틀이 아니었던가요?
보수교회 다수파의 칼빈신학의 로직으로는 영적인 계시신학이 세계와, 죄가 많은 세속적 인본주의 세계의 이분법에서, 성령우위를 명확히 합니다.
WCC신학인 칼 바르트나 본회퍼 등 신학의 로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人-神’논리로 보며, 말씀 수호와 세상참여를 등가로 봅니다. WCC 로잔협약파 존 스토트 목사의 ‘균형잡힌 기독교’는 WCC 신학의 로직을 용어만 바꿔서 쓴 것에 지나지 않는 거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主가 되는 공간입니다. ‘기독교 할머니’ 계모임에 덕담 늘어놓고, 그 여파로 특정인사가 권력 후광을 누리는 공간이 아니란 말이죠.
북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포장입니다. 진실은 65년 민족복음화운동 이전의 한국교회 옛 사람의 복귀 아닌가요? 특정인사가 ‘메이지 계몽주의’안에서 감정으로 사람을 모으고, 그런 위로를 통해서 뭐뭐뭐를 했다고 자랑하는 거 아닌가요?
정말로, 통전적 신학을 주장하려면 적어도 교회내에서 文史哲에 나름 甲인 사람의 모임이 있었어야 합니다. 메이지 계몽주의 전도자 후쿠자와 유키치도 했던 '감정'으로 사람을 모으는 그런 차원이 '하나님의 선교'는 아닌 거죠. (적어도 신학서에 적힌 바로 제가 읽기는 그렇습니다.)
사실, 신앙에서 理性을 중시한 체험이 한국교회는 없고요, 한국교회에 익숙한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몇 대조 올라가면 만나게 될 조선조 엘리트 차원에 복무한 기억 아니었던가요?
하나님 주권을 분명히 하는 신학의 로직. 그것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교회인맥가족주의와 그 가족주의를 특정인사 몰아주기 바람은, 사실은 ‘성리학’에서 개신교로 바꾸어진 옛 사람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한국은 성리학에서 향약 만들때 자기가 甲이란 인식이 있었지만, 원래 교회의 甲은 예수그리스도 가 아니었던가요?
묻습니다. 88년 보수교회는 어디갔나요? 정치만 50년대로 간 게 아니라, 신앙도 50년대로 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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