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발췌] ②
<1950년7월22일>
아직도 딘 장군에 관한 소식은 없다. 대통령을 몹시 걱정을 하며 군과 경찰에 그의 생존 여부라도 빨리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미군 사령부는 대전에서 안동으로 이동하는 한국군은 트럭을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하여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반발,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산길이 너무 험준한데다가 매복한 적군에게 노출될 경우 꼼짝없이 갇혀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다며 그러한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신 국방이 이 같은 사실을 미 사령부에 통고하자 그들도 김 장군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 기차를 내주었다.
신 장관은 한국군 부대가 안동에 무사히 배치되었다거 보고했다. 아울러 마침내 워커 장군과 미군부대에 한국군을 배치시켜 함께 전선에 투입하는 문제에 합의를 보았다고 알렸다. 전쟁 초기부터 우리가 주장했던 문제가 이제야 해결된 것이다. 당시 미군부대에 배속되었던 한국군이 바로 카투사(KATUSA)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7월23일>
대통령과 나는 무쵸 대사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오는 시간 전에 교회를 다녀오기로 했다. 교회는 초만원이었다. 두 분 목사는 차례로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신다며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피 흘리는 이 땅의 젊은이와 우방군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살펴 달라고 기도했다. 설교가 끝나고 대통령은 15분간 교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주며 “조금만 더 참자”고 위로했다.
적은 목포와 대구를 향하여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미군들은 적의 전선 루트에 비행기를 출격시켜 보면 적군이고 탱크가 하나도 보이는 것이 없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까지도 적의 수법을 모르고 있으니 한심한 사람들이다. 공산군은 낮에는 완전히 몸을 숨겼다가 밤이면 이동하는 전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더위를 피해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밤의 전진 속도가 빨랐다. 공산군 수법을 미군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설명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7월26일 저녁은 대통령과 조 지사 부인, 그리고 나 셋이서만 식사를 했다. 메뉴는 가지나물,북어찜, 열무김치하고 고기를 넣은 두부찌개였다. 대통령은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다면서 다음부터는 두 가지만 차려 놓도록 또다시 당부했다. 부인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대통령은 반찬까지도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7월27일>
갑작스런 비행기 폭음에 대통령과 나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적의 야크기가 대구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야크기는 우리 집 위를 바짝 지나갔다. 적기는 대구 운동장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다. 내 짐작에는 그들이 운동장을 비행장으로 오인한 것 같았다. 당시 대구 지사 관저 앞에는 방공호가 있었으나 피할 틈도 없었다.
국방장관이 정오쯤 와서 하동(河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알려주었다. 채병덕(蔡秉德)장군이 전투 중 오전 11시45분에 전사했다. 그는 무기에 관한 전문 지식과 무기 관리에 관한 제1인자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던 장군이다. 외모와 첫인상만을 갖소 사람을 판단하려는 게 미 대사관 사람들이었다. 대사관과 미 장성들은 대통령이 하필이면 왜 한국에서 제일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장성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는지 궁금해 했다.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을 드러낼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채 장군(My General Chai)은 날씬한 장군이 못 가진 기민성을 가지고 있어요. 전문적인 군사지식은 물론, 우리나라에 무슨 무기가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는 경험으로 뭉쳐진 장군이지요.” 대통령은 또 “미남 장군들의 시원스런 큰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채 장군의 졸리는 듯한 눈은 꿰뚫어 본단 말이야”라며 장군을 감싸고 돈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채 장군이 너무 뚱뚱해 걸어가는지 굴러가는지 모르겠다고 입방아를 찧었지만 그는 정말로 충의(忠義)가 있는 한국의 장군이었다. 그러한 채 장군의 전사 소식은 오늘 새벽 적기의 폭음 소리가 찢어놓은 가슴의 상처 이상으로 우리를 비통하게 만들었다.
아군기의 오폭(誤爆)은 계속되었다. 우리 폭격기들은 꼭 한발 늦게 출격하여 적군이 다 떠나버린 장소에 폭탄을 투하했다. 때로는 적군 몇백명이 숨어 있단 정보에 따라 출격한 비행기들이 아예 시 전체를 폭격해서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영동(永同)에서의 미 기갑부대(미 1기병사단) 전투였다. 그들은 영동을 원형(圓形)으로 포위하고 전 가옥을 파괴하다시피하면서 적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적 사살 또는 포로 2천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40여명에 불과했다. 싸움에 이기고도 미군들은 3마일을 후퇴했다. 승리 뒤에도 후퇴한 것이다. 그들은 지연작전을 펴고 있다고 했다. 그 지연작전은 우리 땅을 야곰야곰 잃게 만들고 있었다.
오후 2시15분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부산에 가 있던 김활란 박사를 불렀다.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 알몬드, 휘트니 장군과 스트레트마이어 제독을 대동하고 왔다. 그들은 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일본으로부터 올 수 있는 무기는 모두 건너 왔고 이제는 8월초부터 미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우리에게는 충분한 인력이 있다.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킬 무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즈의 존스톤(Johnston) 기자가 왔다. 그는 미 대사관에서 무쵸 대사로부터 전황 브리핑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미군의 작전계획이 적을 퇴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 뒤를 끊어서 완전 섬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의 반격은 한 두달 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불러서 우리 군대가 단독으로 진격할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정 장군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서 “문제는 미군이 한국군의 단독 북진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해군이 만고 있는 서해안 방어선이 자꾸 뚫린다는 소식이다. 북괴군이 소형 보트로 계속 상륙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적이 부산 가까이 왔다는 보고에 크게 실망했다. 워커 장군은 진주(晉州)에 있는 병력을 하동으로 이동, 배치했다.
적기의 대구 공습이 잦아지게 되자 나는 대통령에게 야간 민정시찰을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대통령은 요즘 저녁 식사 후에는 대구 거리와 골목의 시장을 두루 살피며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대통령은 내 말에 대답도 않더니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조 지사 부인을 향해 “오늘은 나 혼자 나가서 맛있는 수박을 사 먹을 터이니 부인들은 집이나 지키시오”라면서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모시옷을 입혀드리고 조 지사 부인과 함께 따라 나섰다. 시내 안내는 늘 조 지사 부인이 앞장섰다. 대통령은 구멍가게와 싸전을 둘러 본 뒤 철물점으로 들어가 삽과 괭이 같은 농기구를 이모저모 살폈다.대통령이 “참 잘 만들었는데”라고 하자 주인이 “그 삽은 국산입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삽은 일제(日製)였다. 상인이 대통령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눈치 챈 조 지사 부인이 “무엇이나 정직하게 말씀드려야 하지 속이면 못 써요”하고 핀잔을 주자 철물점 주인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밤에도 피난민 대열은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김천 쪽에서 오는 피난민들이었다. 대통령은 침통한 얼굴로 피난민들을 쳐다보며 “우리 국민들이 너무 고생한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밤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뜻을 비쳤다. 이 장군은 현재 밀리고 있는 전세(戰勢)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대통령에게 보였었다. 문제는 미국이 쉽게 응해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7월28일 아침>
신 국방은 적군이 하동을 지나 진주로 진격하고 있으므로 한국군 17연대를 안동에서 진주로 보냈다고 보고했다. 마산도 위험하다. 남원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진주에서 적을 막지 못한다면 부산의 운명도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무쵸 대사와 노블 서기관이 오전 11시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겠다고 했다. 무쵸 대사는 “신 국방이 잘 해내고 있다”면서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하여 경질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반대했다. 신 국방은 또 유임되었다.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무기원조를 요구했다. “우리는 청년단을 조직하고 있다”면서 “만일 그들에게 총을 주지 않는다면 죽창이라도 만들어서 적군의 길목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대구 남쪽 산맥에 이미 적의 게릴라 3개 부대가 숨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대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부산은 시간문제이므로 대구 사수는 절대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미군들은 이 사태의 긴박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존스톤 기자는 미군들이 하지(John R. Hodge) 장군을 다시 한국에 데려오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한국인들이 하지 장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고 모든 일을 악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새벽 3시30분 적이 벌써 함양(咸陽)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적이 우리 부대(17연대)가 진주로 이동한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우리에겐 사람은 있으나 무장한 군인이 없다. 대통령은 워커 장군과 무쵸 대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또 한 번 무기공급을 애원할 참이다.
<7월29일>
아침에 내무부장관 조병옥 박사가 워커 장군을 만났다. 조 장관은 미군이 전면 공격만을 생각할 뿐 도처에서 준동하는 게릴라들에 대해서는 무방비라고 비난했다. 그는 어제 저녁 북괴 게릴라들이 울산에 침투한 것을 우리 경찰부대 50여명이 퇴각시켰다고 보고했다. 그는 적이 최근 정규전보다 게릴라전 방법으로 야금야금 점령지를 넓히고 있고 함양, 남원이 이 같은 방법으로 실함(失陷)되었다고 분석했다.
국방장관은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17연대가 함양∼진주 전선에 투입되기 위하여 이동 중 대구역에 잠시 머물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타임>지의 백 대령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는 옹진(甕津) 전투의 영웅이었다. 우리는 17연대의 철수로 북쪽 전선이 큰 파국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철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다.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서 쌀값은 아침, 저녁이 다르게 뛰어 오르고 있다.대통령은 점심을 밥 대신 삶은 감자나 밀가루 음식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사실 대용식을 바꾸고 나서 대통령은 몹시 허기(虛飢)를 느끼는 듯하다. 어제 저녁에는 김장흥 총경과 야간 민정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팔다 남은 떨이 복숭아를 한 보따리 사들고 들어왔다. 복숭아는 좀 상해 있었다. 나는 곯은 곳을 잘라내고 감자처럼 푹 쪄서 식으로 내놓았다. 대통령이 너무나 맛있게 6개나 들었다.
부산과 포항에는 각기 8척, 4척의 수송선에서 병력이 상륙했다. 라디오를 들었지만 최근 미국에서 증파된 경비함의 활약상은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 해군 경비정 2척이 진남포(鎭南浦)에서 남하하는 적의 보급선 12척이 서해안의 좁은 해협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려 차례차례 명중시켜 침몰시켰다. 적의 생존자는 한 명도 없고 우리 젊은 아이들을 죽일 많은 군수품은 고스라니 수장(水葬)되었다. 이 해전의 승리를 국방장관으로부터 정식 보고 받았을 때 대통령과 나는 함께 원더풀을 외쳤다.
대통령은 인내의 한계를 넘기고 있다. 대통령 자신은 온 국민과 더불어 대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 오늘 밤 대통령은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마미, 적이 대구 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그쪽에 부탁해 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 주시오.” 나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 손을 꼭 잡은 대통령은 “다신은 망명정부를 만들지 않을 거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 하면서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창밖 멀리 떼 지어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슴 저리게 들려 왔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는 소리, 끌고 온 송아지의 배고파 하는 울음소리며 달구지의 삐걱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들어와 박힌다. 창틀을 움켜 쥔 대통령의 기도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가? 이제 결전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우리 한 사람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7월30일 이른 아침>
대통령은 오늘밤에도 대구거리로 나갔다. 자정 가까이 되어서 돌아온 대통령이 뚱딴지 같이“마미, 나 오늘 순사한테 잡혀갈 뻔 했어”라고 말했다. 사연인즉, 오늘 낮에 이기붕(李起鵬)서울시장 내외가 대통령께 드리려고 잣 한 봉지를 가져 왔다. 나는 허기가 질 때 드시라고 이 잣을 대통령 포켓에 넣어 두었다. 대통령은 누구에게서든지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받으면 꼭 답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이날 밤도 대통령은 이기붕 시장의 잣에 대한 답례로 참외를 사 주려 했다. 그 참외는 이기붕 시장의 어린 두 아들 강석과 강욱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참외는 1천원에 7개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덤으로 한 개만 더 주시오”라면서 한 개를 더 집으려 하자 참외장수가 “할아버지라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 하면서 도로 빼앗더라는 것이다. 이기붕 씨의 외모가 워낙 왜소하고 쪼글쪼글 한데다가 대통령도 풀 안 먹인 후줄근한 모시차림의 늙은이였으니 참외장수가 대통령과 서울시장 일행을 알아 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거 참, 참외 덤 얻으려다가 순사한테 잡혀갈 뻔 했다니까....” 대통령은 재미있다는 듯 자꾸만 웃었다. 나도 참외장수가 되었다. 힘없는 모시옷의 저 노인네, 대통령은 피곤해 보이고 더 늙어 보였다.
대통령의 참외선물을 받은 이기붕 씨의 두 아들 강석, 가욱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다가 대통령의 말동무가 되었다. 대통령은 두 형제를 보자 “요놈들, 이 할아버지하고 팔씨름 시합하겠니...” 하고는 팔을 걷어붙였다. 대통령은 언제나 상대편에게 역전승(逆轉勝)을 시켜 주었다. 대통령은 꼬마들의 주먹이 바닥에 닿을 듯 할 때까지 힘을 주었다가는 “아이고 힘들어,못 당하겠네!”라면서 차츰차츰 자신의 팔을 기우려 주곤 하는 것이다. 꼬마들은 얼굴이 새빨가지도록 용을 쓰다가 역전승을 하면 신난다고 박수를 쳤다. 내가 “어차피 져 줄 것을 아이들 힘을 그렇게 뺄 게 무엇이냐”고 묻자 대통령은 “지더라도 최선을 다 하는 인내를 키워주고 결국에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