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엇을 위한 ‘한국 교회 신앙’의 자폭인가?
한국 교회 신학의 자폭 현상은 이 분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한국교회 신앙’의 자폭인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견적이 안 나오게 표현한 이 글을 평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서구 기독교에 있어서 이단 신앙으로서 여부를 생각해보자. 영화 [선 어브 갓]에도 분명히 나왔지만, 초대교회는 그리스 헬레니즘의 지배자 믿음, 피지배자 믿음으로서 유대교 신앙에서 분리된 차원으로 존재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神本主義와 人本主義의 이분법을 취한다. 행동을 모두 그리스 종교축제로 소급하는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 소산으로 보며, 이단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가 시작되면서 칼비니즘 수호를 통한 종교전쟁을 빚고, 근대 합리주의 속에서 예수 신앙을 지키면서도 관용과 화해를 지키는 선택을 하는 경향이 생겼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논의하며 인본주의(그리스 종교축제, 곧 脫교회, 혹은 反교회)로 나아가는 취지고,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벗어나 성서적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인본주의’가 결합되는 측면이고, 프랑스 계몽주의는 ‘인본주의’가 강조되는 측면이다. 이어서, wcc 로잔 협약 계열에 존 스토트 목사는 칼 바르트와 본회퍼 사이 쯤의 노선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칼빈주의적 성경해석의 연결된 모습을 보인다. 이는 한국에 ‘균형 잡힌 기독교’로 평가 전해 왔다.
그리고, 서구 기독교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구분항이 있다.
한국에서 인간은 그리스 종교축제가 아니라, 동북아 샤머니즘 제정일치 종교행사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 인본주의에는 다원적 주체가 서로 만나는 믿음이 존재하고, 그것이 대화 소통의 근간으로 자리하지만, 동북아 샤머니즘 종교는 어딜 살펴봐도 그런 계열의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가족이나 마을 사람끼리 잘 먹고 잘 산다는 믿음만 존재한다.
부족 神은 유교, 불교, 도교 등 갖가지 종교를 혼자서 다 관장한다. (서구의 다원주의는 분산된 주체고, 동북아 다원주의는 임금의 권력집중이며 완전히 다르다) 부족 神의 제사는 주로 ‘비’가 내려서 백성들 농사 짓는데 잘 되게 해주라는 것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운지’하는 추장의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공무도하가’는 기우제 제사에 실패한 운지한 추장의 이야기. 그리고 ‘구지가’는 비 안온다고 無能공격에 시달리는 약체 추장의 이야기란 이야기가 있다)
김 총장은 "우리가 왜 교회를 세우냐?"고 물으며 "새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세계 역사 속에서 악과 싸우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새 사람을 만드는 일도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식민지 마귀를 무너뜨려야 하는데 그게 무너집니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서냉전을 무너뜨려야 되는데 그게 무너집니까? 휴전선을 무너뜨리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만들어야되는데 그게 그렇게 무너집니까? 신자유주의 경제로 말미암아 세계가 고통 속에 있는데,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만들어집니까?" 물으며 기도가 가능케 한다고 했다.
철저하게 주인됨이 자아다. 특히, 합리적 서구 이성이 아니다.
철두철미 기복주의 呪術이성의 개입이다.
권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해결되는 것이다"고 했다.
철저한 기복주의 의식이다. 예수는 더 이상 성서적 입장이 아니라, 무속 서사 무가 속에서 무속 神으로 변화된다.
김 총장은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하나님 자신이 죽을 결심을 하신 것이다"며 "천지창조와 인간창조는 이미 하나님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는 창조다"고 말했다
고난은 민중신학에서 ‘통과제의’(큰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는 한국의 무속 영웅 신화에 깔린 것) 수준으로 변화된다.
도교 신앙을 끌어안으면서 삼위일체 임마누엘 신앙은 당연히 무너진다. 神-人 논리로 바라보는 칼 바르트 신앙에서, 피조물 세계에서도 예수의 주권이 임한다는 차원도 아니다. 마귀가 역사의 주체라고 말하는 데에서는 골아픈 지경이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세계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인줄로만 생각을 하지만 세계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넷이다"고 했다. 그는 "물론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이 진짜 역사의 주이시만 두번째 주체가 자유로운 인간이고, 인간만 자유로운게 아니라 이 세계 모든 피조물들 속에도 다 자유가 있다. 그리고 마귀가 또 하나의 역사의 주체다"고 했다.
그는 "영적인 존재들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천사의 타락할때도, 거기도 자유가 있기 때문에 타락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솔직히 이렇게 자신이 먼저 신앙을 자폭시켰는데, 무너진 교육을 어떻게 되살린다는 지 속이 갑갑한 마음을 들게 한다.
http://www.christiandaily.co.kr/news/장신대-기독교교육과-무너진-교회교육-대안-찾는다-56306.html
도교는 앞서도 제시한 바 농업사회 속에 종교다. 비가 내리길 바라는 기복주의 농민 심리를 전제한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반면에 무역사회 지중해권 문화 속의 종교형식이다.
제퍼슨이 인본주의화된 기독교지만 미국 건국에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세상화하려는 배경은 이런 점을 안고 있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 ‘도교’를 기독교로 추인하려는 것(이는 십계명에서 샤머니즘 한울 神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점에서의 위반이다)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같은 무역사회를 포기한 자급자족 경제를 하는 종교정치를 시도하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道敎를 기독교의 차원으로 품는 것은 바로 ‘민중신학교단’의 ‘천도교의 기독교화’의 실체다. 이는 곧 ‘장신대’라는 한 신학대학의 ‘신학적 전통’의 중단을 의미한다.
도교 무속 제사장과 기독교 제사로서 교회를 덮어 쓰는 것은 ‘통일전선전술’로서 엘리트를 전면화하는 측면에 있다.
김대중의 ‘3단계통일방안’과 ‘대중참여경제론’ 과 종북좌파의 방북행위를 통해서 ‘상생화해’ 운운하는 담론은 모두 진보 좌파가 도교 무속 제사장이란 말이다. 여기에, 기독교 용어를 덧보태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대동아공영권’ 신사참배논리와 겹쳐진다. (정말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인 김기종 등 좌파 진영의 테러리즘 열기의 무속적 열망은, 바로 일본 극우세력의 ‘가미가제’ 차원과 종교심리가 거의 닮아 있다는 측면이다.)
대동아공영권 신사참배에 줄 세우는 기독교는 천황 시다바리가 되는 것이고, 김대중의 ‘3단계 통일방안’의 기독교는 ‘통일전선전술’ 시다바리가 되는 것이다.
망한 신앙임을 고백할 대상이 어떻게 신앙을 바로 세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천인합일 개념에서 솟아나는 무속신앙개념이나, 도교 개념은 어떤 경우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릴 수도 없고 말해질 수도 없다.
<하나님 팔아서 통일을 살 수 있나요?>
더 추가적인 질문이 있다.
<대한민국을 팔아서 이북주의를 살 수 있나요?>
여하간, 도교나 무속신앙 개념을 기독교개념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할 수 없는 기독교 윤리의 자체모순을 대거 창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