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정전회담과 이승만

대한민국 2014.06.11 09:42 조회 수 : 225

정전회담과 이승만

written by. 정일화

대한민국의 적극적 주권행사...대규모 전쟁 재발방지 체제 구축

  전쟁은 마무리가 중요하다. 한국전쟁은 세계최대군사국가인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이 벌인 거대한 전쟁이었고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엄청난 무력이 맞부딪쳐 세계 전쟁사상 전쟁강도(Warintensity)가 가장 높은 전쟁이 되었지만, 정전회담 마무리를 통해 적어도 지난 60년간 그런 대규모 전쟁을 방지했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로서 세계 10대국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정전회담에서 이승만 정부는 이런 방향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미한 신생국으로 출발하여 곧장 거대한 전쟁에 휘말린 대한민국이 소련·중국·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무대를 장악한 한반도에서 주권자로서 국제정치 행위 주체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온 세계가 쳐다보는 정전회담 무대에서 당당한 국제정치의 행위자로서 대한민국이 바라는 정전회담 장치를 충분히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주권의 적극적 역할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세계역사상 전쟁강도가 가장 높은 전쟁

 전쟁의 시작과 경과는 참으로 비참했다. 한국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소련·중국·미국·북한·남한, 그리고 유엔참전국 16개국을 비롯해 세계 30여 개국이 2차 대전 때 쓰던 강력한 최신무기와 연 병력1천2백만 명이 동원되어 싸운 거대한 국제 전쟁이었다. 전쟁 3년1개월 동안 한반도상에는 하루 평균 1천4백대의 전폭기들이 출격대기상태를 유지하면서1천회 이상의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후방차단(Interdiction)·공중정찰(Airreconnaissance)을 위해 쉴 새 없이 폭탄을 퍼부었다.

 미 해군의 역할은 눈부셨다. 전쟁 3년 동안 한반도해안 3면을 완전장악하고 있으면서 함재기와 함포들은 북한 깊숙이까지 폭탄과 포탄을 퍼부었다.

 이 전쟁의 승패는 중국·소련국경을 얼마나 잘 봉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선이 남쪽으로 죽 내려와 있을 때도 항공모함은 북한 영해 깊숙이 들어가 국경을 통해 넘어오는 보급차량과 기차, 그리고 보급노선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계속했다.

 한국전에 미군기들이 북한군에게 퍼부은 폭탄의 양은 2차대전 때 연합군이 유럽전선에 투입한 양에 맞먹는 1백10만 톤이었다.

 북한은 유엔군 전폭기를 맞아 싸울만한 공군력은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공중전을 벌일 수 없었으나, 대공포 망을 늘리고 뒤에는 소련제 최신전투기 Mig15 를 띠워 악착같이 대항했기 때문에 피해도 컸다. 한국전에서 떨어진 유엔군 전폭기는 2천여 대(미군기만1,986대)에 이른다.

 초기 전황은 너무 급했다. 북한 인민군은 최신 소련제탱크 T34-81 2백50대를 동원해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병대 수준의 대한민국 국군을 사정없이 밀어제쳤다. 세계전사에 유례없이 수도서울이 3일 만에 적의 손에 넘어갔다.

 유엔결의에 의해, 유엔 선거감시단에 의해 나라가 섰고 또 유엔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대한민국의 운명이 시간을 다투면서 깜박거리기 시작하자 유엔은 긴급이사회를 두 번이나 연거푸 열고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여 이 침략자를 물리칠 것을 결의했다.

 미국은 2차 대전의 승자였고 세계최대의 군사강국이었지만 워싱턴에서 6천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에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동원할 수 있는 공군 지상군을 서둘러 한반도 싸움터로 내보냈다.

 해군의 거대한 태평양사령부도 7함대를 동원해 급히 한반도로 파견했다.
한국에 급파된 미 지상군 500명은 7월 5일 북한침략군과의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첫 전투를 벌였으나 형편없이 깨졌다. 미군은 이어 평택에서도 터지고 금강전투에서도 지고 대전에서도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무참하게 패배하는 고배를 마셨다.

 공군기가 윙윙 날아갔으나, 도무지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할지를 몰랐다. 미 7함대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함포를 쏘고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새까맣게 띄웠으나, 표적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전선에 방어선을 치고 이곳에서 “버티든지 죽든지 하라”(Stand or Die)는 모진 작전명령을 내렸다. 낙동강 6백리가 피로 물들었다. 한국군은 낙동강전선쯤에 와서야 겨우 대오를 수습하고 질서 있는 전투를 하게 되었지만, 미군의 강력한 공중지원과 화력지원으로 겨우 버틸 뿐이었다.

 낙동강전선이 안정되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후방을 성공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 인민군의 패주가 계속되었다. 38선을 넘어 평양을 뺏기고 평안도·함경도의 대부분이 유엔군의 손안에 들어왔다. 통일이 눈앞에 들어오고 있었다.

 중공군은 한국군 지역을 골라 뚫었다

 중공군 1백만이 들어오면서 다시 전쟁은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1일 평균전력, 최고일 때는 1백40만 운용 팽더화이(彭德懷)는 비행기도 없고 대포 숫자도 신통찮은 게릴라부대 같은 대군을 끌고 왔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붙었을 때 유엔군은 참패했다. 한밤중에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달려드는 중공군 인해전술 앞에 거대한 화력은 맥을 못 쓰고 무너져 내려갔다. 서울을 다시 뺏기고 오산·평택까지 유엔군은 후퇴했다. 낮에는 나무숲이나 동굴 안에서 자고 밤중에 일어나 6대 1의 월등한 인원으로 달려드는 자살특공대 공격을 미군은 한 번도 당해 본 일이 없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 전선이 무너지는 형편은 늘 한국군 지역이 먼저였다. 초기 탱크로 무장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올 때처럼 중공군은 한국군 지역을 향해 무자비하게 밀어붙였고, 한국군은 그때마다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내게 했다. 중공군은 한국군이 내어준 이 구멍을 통해 대거 후방으로 침투하여 미군부대를 후방과 측방에서 동시 공격하여 낭패케 했다. 한국군은 중공군의 밥이었고 미군의 짐이 되었다. 리지웨이는 전쟁공포에 빠져있는 미군을 격려하면서 보급로가 멀어진 중공군을 위력정찰(Reconaissance in force)로 조금씩 밀기 시작해 곧 서울을 회복하고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붙였다.

 38선을 인민군-유엔군-중공군-다시 유엔군 순으로 넘어서면서 전선은 38선 주변에서 교착되기 시작했다. 소련전차에 의한 인민군 기습공격이나 맥아더사령부의 막강한 화력을 이용한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그리고 중공군이 1백만 대군을 휘몰아 인해전술을 벌인 과
정에서 보면 한국군은 거의 설 자리가 없었다. 미약한 처지에 있어야 했다. 침략자인 인민군은 국군을 ‘남조선 괴뢰군’이라고 불렀고 대한민국 정부를 제국주의의주구(走狗, Running dog)라고 선전해 왔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힘겨루기가 거의 무승부로 끝나고 전선이 교착되면서 1951년 6월 정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정전회담이 발표되자 전쟁은 곧 끝날 것으로 여겨졌으나 장장 2년 2개월이나 되는 긴 회담을 거치고 난 뒤에야 정전협정이 이뤄졌다. 유엔군 측이나 공산군 측 모두 이 전쟁은 군사력으로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힘겹다는 결론을 내고 있었고 전쟁이 있기 전의38선 근처에서 대강 정전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전쟁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미국·중공·소련·북한이 원하는 정전, 한국만 반대

 이승만 정부는 전혀 달랐다. 북한군의 탱크공격을 받았을 때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중공군 인해전술에 전혀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첫째 정전회담 자체를 반대했고, 둘째 정작 정전협정을 맺으려면 공산세력이 대한민국을 다시는 침략할 수 없는 장치를 해 놓아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정전회담은 유엔대표와 북한대표를 수석으로 하고 남북한 중국 장성이 동석한 각각 5명의 대표로 구성되어 회의가 열렸다. 대한민국은 마지못해 회담에 대표를 보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회담에 매우 냉담한 태도였다.

 남북통일의 기회를 잡은 지금 정전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을 뿐 아니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이 침략집단인 북한 대표나 역시 유엔이 침략자로 규정한 중공군 대표와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논리에 벗어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엔은 1950년 10월 7일 총회결의를 통해 맥아더가 38선을 넘어 진격할 것과 북한군을 무력화한 후 자유롭고 민주적인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이 결의를 지키라는 이승만의 주장은 결코 엉터리가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이 원칙적으로 정전에 동의하고 있는 한 정전회담을 한국 단독으로 저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정전협정이 서명되기 전 적어도 북한 인민군의 소제(蘇製) 탱크전이나 중공군 1백만의 인해전술이 재연되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도 아니며 전쟁수행 동안 적극적 군사역할도 할 수 없었던 한국정부이지만 전쟁을 중지하는 과정에서는 전쟁 당사자로서 적극적 주권행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전 국민을 동원하여 정전회담 반대 데모를 격렬하게 벌였다.

 판문점 정전회담장에서는 미국·중국·북한 모두 전쟁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피로현상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결국 정전회담에 서명하기로 마무리되어 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반정전적 행위를 서슴없이 실행하고 있었다. 중공 측 대표와 북한 대표는 미국 대표에게 “미국은 정전협정 성사후 대한민국을 정전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럴 능력이 없다면 한국 대표를 이 자리에 끌고 나와 같이 서명케 하라.”고 윽박질렀다.

 미국 대표는 “대한민국은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가 어떤 행위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대한민국이 우리의 합의를 존중하여 지킬 수 있도록 고무(Inspire)할 수는 있다.” 고 말하고 사실상 정전회담 전체를 대표하여 이승만과의 새로운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의 회담기록을 보면 정전회담은 판문점에서 일어났지만 그 결정은 경무대에서 이뤄졌다는 표현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적극적 주권행사가 발휘되었던 것이다.

 특히 미국은 전쟁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대통령선거전에 들어가자 공화당후보인 아이젠하워 장군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조속히 한국전을 마무리 짓겠다고 공약하고 있었다. 미국은 정전회담대표(Turner Joy 해군제독)와 유엔군사령관(Mark Clark)을 이승만에게 보내 한국정부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주한 미 대사 William Briggs와 미 국무성에서 따로 특임대사로 파견한 국무차관보 T.Robertson 대사를 통해 이승만의 정전회담 승인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정전회담의 열쇠가 공산당대표들이나 중공과 소련의 수뇌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승만의 손으로 넘어와 있었다.

 한미공동방위조약(Korea-US Mutual Defense Treaty) 체결과 국군 사단을 20개로 증강하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전후 경제복구를 위해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2억 달러를 즉각 지불한다는 항목도 경무대회담에서 논의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정부가 쉽게 내걸 수 없는 엄청난 국제거래를 하면서 조금도 굽실거리거나 타협을 하려 들지 않았다.

 경무대에서 최종 결정되는 정전회담

 미국은 정전회담에 한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제의를 모두 수용했다.
이승만은 정전회담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해도 회담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첫째, 포로교환에 관한 내용이었다. 유엔군 측은 1, 2차대전을 통해 정립된 제네바포로협정을 착실히 준행하여 12만 명에 이르는 공산군포로를 잡은 후 국제적십자사와 협력을 하면서 착실한 인원관리와 인간적 처우를 했다. 공산군 측도 그럴 것으로 기대했다. 북한 측 방송에 의하면 인민군이 포로로 잡았다고 보도한 인원만 6만5천명이 넘었다. 대체로 10만 명쯤 포로로 잡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포로교환협상에 들어가자 유엔군 측은 처음에 1대 1로 포로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가 결국 모든 포로를 한꺼번에 교환하자는 것에 합의하고 상호 명단 교환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양측 명단이 교환되면 원칙에 따라 즉각 포로를 본국에 되돌려 보낼 예정이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비롯한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수용된 포로는 국군으로 있다가 인민군에 강제편입 되었다가 포로로 되었거나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포로가 된 소위 반공포로가 50% 이상이었다. 중공군포로로 잡힌 포로 중에는 자유중국 출신들이 많이 있어 이들도 공산국가인 중국 대신 자유국가인 대만으로 가기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승만은 아무리 제네바협정이 엄격하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또는 국군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포로수용소를 지키는 국군헌병에게 명령하여 반공포로가 모두 수용소를 탈영하게 하고 지방관계자들에게 탈출한 포로를 적절히 도울 것을 주선했다. 당시 국군은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기 때문에 포로를 엄중히 지켜야 한다는 유엔군사령관의 군사명령을 어기고 한국헌병이 포로를 탈출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주권을 발휘하여 이들을 석방하도록 했던 것이다.

 둘째는 정전협정 조항 중 정치회담을 무력화했다.
정전협정 제5항에는 양측이 군사분계선에서 군사행동을 멈추게 된 후 한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기 위해 국제평화회담을 개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승만은 한반도 문제를 파리나 제네바 같은 국제무대로 끌어내어 평화협상이라는 이름으로 공산당 음모 대상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90일간이라는 시한을 정하고 이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73년 베트남 정전회담 후 파리평화회담이라는 정치회담을 열어 베트남 내 게릴라 조직을 임시정부로 내세웠고 베트남정부는 결국 멸망한 것을 보면 이승만 전략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셋째, 중립국감시국의 대한민국 입국을 금지했다.
정전협정 체결 후 진지변경·군사증강·외국군 이동을 감시하고 포로교환을 실시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스위스·인도·폴란드 등 4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다. 이승만은 포로교환 문제를 이행하기 위해 인도군대가 들어오기로 한 것에 대해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이들이 대한민국 땅에 발을 붙이면 총을 쏴 사살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인천 앞 바다에 정박한 유엔군 선박에서 보호되면서 헬리콥터로 비무장지대에 내려 임무를 감당했다.

 넷째, 중공군의 전쟁개입이 유엔결의에서 명백해 규정한 바와 같이 불법이며, 불법침략자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즉각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여 침략자라는 것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승만 정부는 정전협상을 통해 이 전쟁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전쟁이었다는 점을 천명하면서 다시 그런 국제적 음모가 일어날 수 없게 하는 장치를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정전협상을 이끈 미국 측 대표들은 판문점 정전회담은 사실상 ‘이승만 회담’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승만이 구상하고 요구한 사항이 이뤄진 회담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2차대전 말인 1943년 12월 1일 카이로회담에서 미·영·중·소 4개국 원수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 독립을 약속한 이후 카이로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한 포츠담선언이나,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유엔 결정과 선거감시위원단 파견, 그리고 6·25전쟁 중 유엔군 파견으로 대한민국이 지켜진 전 과정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수혜자 또는 소극적 주권자로서만 인식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정전으로 가는 정전회담에서 이승만이 보인 과감한 정전외교는 미국·중국·북한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적극적 주권행사자의 역할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정전회담을 통해 대한민국이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 회원국의 괴뢰정부가 아닌 당당한 전쟁주권국이라는 것을 세계에 과시했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한미방위조약·국군증강·전후복구사업을 얻어내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안전과 번영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런 정전체제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긴 긴장의 연속이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안전과 번영을 가져 왔으며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발전했다. 이승만이 구축한 정전체제가 그만큼 앞을 내다보는 탄탄한 체제였기 때문이다.(konas)출처:월간충호

정 일 화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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