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보수논객의 세속적 드립보다 칼빈주의가 먼저다
민주화 이후 보수논객들이 꺼리는 한국교회 전통이 있다. 바로 군사정부 때 대형집회를 통한 신앙의 열정 회복 영향이다. 당시는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 ‘어린이’였다. 그런데도, 그 당시의 문화는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복음성가 ‘그리스도의 계절’ 유튜브 동영상에 삽입된 김준곤 목사님의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차원은, 당시의 대형집회 문화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수호에도 ‘정당’성향이 존재한다. 민주당 신파, 혹은 구파만 값어치가 발휘하는 붕당성이 있는 상황에서, 적어도 그 대형집회는 민중세력과 어떤 식으로든 거리를 가졌기에 지원받았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이름을 내기 위해서는, 그 집회와 거리를 홍보해야 하는 문제가 분명히 존재했고, 일반 보수교회 성도들에게는 차디찬 모멸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김대중을 계속 측면 지원한 천주교가 민주화 이후 대접받는 것을 부러워하는 감정까지도 실제 했다)
민주화 이후 활동하는 보수논객들은 한결같이 군사정부 때 대형집회 문화와 연관되는 것을 문화적으로 짓이겨버리는 차원으로서 ‘세속주의’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뒤집어 말해서, 박정희 시대 관료 출신들의 입술로 ‘5.16’이 쿠데타라는 복면복창을 받는 관습과 연결된다. 나는 5.16의 가치를 긍정인지 부정인지 평가를 열어둔다. 다만, 5.16을 부정시하는 측면과 다른 차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민주화 이후의 적폐를 알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적폐가 절대 善이란 전제로, 그 당시가 절대 惡인지는 의문한다.
민중운동 진영에서 김대중의 정신적 스승인 함석헌이 기독교와 유교가 무너지면 애국문화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는 주장(예수 믿기 시작하고 처음 출석하던 교회의 전도사 주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사실 같다고 파악된다. 특히, 文化에서 반공세력이 이기는 틀에 갇혀서 자기들이 고통 받는다고 여기면서, 온 세상에 자기들이 이기는 프레임을 깔아두면 자기들이 모두 다 이길 것이라는 80년대 후반의 직접 듣기도 했던 민중세력의 호언장담은 사실처럼 다가온다.
나는 보수 논객들에 ‘막스 베버’ 수준조차도 아쉽다. 기독교 관련 서적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막스 베버를 두들기는 게 일반적이다. 청교도는 번영을 위해서 예정교리를 이데올로기로 써먹는 존재가 아니라는 차원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보수 논객은 함석헌 지휘 통제 아래 뭉쳤던 특정 세속정당성 아래에서, 칼빈주의 교리 자체도 파괴하는 천도교 취향의 무속주의를 먼저 쓰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군사정부 때 대형집회를 가능케 했던 권력은 없다. 그러나, 묻자. 그 집회에서 만난 예수님은 “민주공화당”의 당적이 있단 말인가? 없다!!!
게다가, 시장을 둘러싸고 기독교적 영적 가치를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농민적인 비합리적 떼쓰기로서 밖에 안 남는다. 보수 논객은 신경질적으로(그렇게 해야 마치 커텐 뒤의 어떤 실체에 인정 받는 다는 차원을 연상시키듯)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 될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름의 고백조차도, 틀어서 교회 안에서 세속이미지 퍼부어대려고 안달한다.
나는 경제의 복음화를 논의하는 차원에서, 이미 근대 계몽주의 이후의 자유주의 신앙을 인정한다. 문제는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되는 가치가 분명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차용한 독일 기본법 당시에서 종교의 자유 조문은, 자유주의 신앙이 존재하는 독일 교회를 배경으로 나오기도 했다.
더도 덜도 아니라, 무수하게 한국교회에 헛돌고 있는 ‘기독교윤리’가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면, 한국의 시장질서가 가족주의로 여러개로 쪼개지는 현 상황은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따지고 보면 그렇다. 복음주의 신앙부터 자유주의 신앙, 그리고 타 종교까지 理性활용을 매개로 國家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런 理性이 매개된 소통공간이 시민사회요, 그 시민사회에서 예수 믿는 자들에겐 ‘교회’가 존재하고 그들의 물질생활에는 시장사회가 존재헀다.
한국교회에 칼빈주의가 먼저다. 물론, 칼빈주의가 먼저라는 것은 교조적 차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중심 골격은 아무도 허물 수 없다는 차원을 전제한다. 마치, 헌법에서 중심골격의 동질성을 존재로 국민의 소통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당연한 말인데 꽤 낯설어지는 게, 현 한국 교회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