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횟말을 진영담론화 시켜서 쓰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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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odntalk.com/sisa/31225
나는 한정석씨의 ‘거룩한 오류’라는 딱지의 관행이 시작된 뿌리부터, 나는 의문한다. 도대체, 왜 “거룩”이란 단어를 보수정치가 추구하고 싶은 차원에 ‘꼬리표(머리표)’정치로 붙여야 했을까? 적어도 80년대 후반학번으로 사회과학서적이 넘쳐날 당시에 책을 즐겨하던 이들에겐, 의문한다.
이 관행은 본인과 같은 교단 교회에 출석중이라고 알고 있는 김성욱기자에 의해서 시작돼다고 안다. 그리고, 불교신자로 알려진 보수논객 박성현씨와 이승만 기념사업 중심세력에 의해서 확산됐다.
“오메, 같은 교단 출석중인 분이 썼네. 보수진영 앞장 선 분이 두루 다 쓰시네.” 그러면, 眞理인가? 한국 보수사회는 이러면, 대부분 그냥 침묵해 왔다.
나는 김성욱기자가 출석중인 교단의 반공교회 설교에서 군사정부 시절에 드러난 것을 주목한다. 그런 전통 차원에서 이런 논리를 반박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B%A3%A9,_%EA%B1%B0%EB%A3%A9,_%EA%B1%B0%EB%A3%A9
군사정부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폭동 에너지가 있었고, 지금보다 훨썬 덜 신학서적이 있었다. 그때 진지하게 반공교회가 고민하는 것은 ‘청교도 신앙’과 ‘청지기’정신이다. 물론, 크로스체킹하여 본 중립적 표현으로는, 교계 지도자들 수준에서만 고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반공기독교 진영에서는 청교도 신앙과 청지기 신앙의 혼연일체로 보는 사실에, 진보성향의 민중교회나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상층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교회 출석 대중들은 ‘위선적’이었다고 평가하는게, 크게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게 솔직한 인식이다.
사실은 신앙 언어에서 본질적으로 갈수록, 他신앙을 가진이들이 이해할 수 없다. ‘거룩’이란 말에는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차원의 자기 겸손을 전제한다. (찬송가 ‘거룩,거룩, 거룩’의 우리말 가사를 음미해보라) 그러나, 한정석씨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보수교회 쪽 사람들의 지지를 의도한 듯 언론계에서 흔한 ‘용어선점 전략’으로 치닫고 있다. 이를 실제로 믿어주고 따르게 된다면, 답은 하나다. 신앙의 事物化다.
지금 무상급식과 동일한 문제 방식이 70년대 박정희 시대에 존재했다. 기업은 근로자를 잘 우대할 돈이 없었다고 하고, 야권은 근로자에게 ‘뭐뭐뭐뭐’를 했어야만 한다는 조건을 깐다. 농민정서를 가진 천도교이거나 그런 식으로 세탁된 변질된 기독교를 믿는 측에서는, 정부는 그야말로 "개새x" 수준이겠지만, 신앙 떠나서 초딩 수준의 수학논리를 생각할 때, 정부의 행동은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이 있었다. 이런 방식은 50년대에 세계 최고 가난한 국가였는데, 선진 복지국가 법조문의 서비스를 해야 된다는 사고에 연결된다.
거두절미. 안 믿는 사람이거나 진보측에 비춰진 반공주의 개인들의 모습은 어떤 형상일까? 나는 크로스체킹 차원에서 진보 서적을 전부 본다. 쌍방을 다 보면, 쌍방의 허위가 보인다. 반공 성향의 개인들이 반공이 비난하는 좌파 못지 않게 개인만 아는 차원이란 것이다.
한국에는 사회에 전가할 만큼의 시민정신의 구체화가 없다는 것. 이런 것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좌익 출신 가문이 아닌데도 민중운동에 동의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정부가 복지를 해줬으면. 그런 전제가 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자유주의 이론서들은 대부분, 청지기적인 삶을 살 기회를 박탈한다고 기록됐다. 이웃과 나누는 청지기적 삶이 과연 한국에 보이나? (민중교회측의 보수교회 비난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슬픈 모습은, 신앙대로 사는 사람 숫자가 과거에도 그리 많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
“한국 좌파”를 논하는데는 서구 이론 다 쉬시고, 한국인 민족성에 담긴 농민유전자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한정석씨의 이론 드립은 사실은 非본질적이거나 주변적인 것이 중심으로 차지한 것이다. 즉, 박정희 전두환 시대 ‘近代化’시대가 길러낸 서구지향적 主體의식의 반영일 뿐이며, 그 테두리 내에서만 공유될 뿐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기독교신앙용어를 정치적 분파주의에 쓰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신앙차원에서 신앙의 고백이 하다보니, 특정 정치를 편드는 것 까지는 뭐라할 수 없다. 처음부터 신앙용어를 정치적으로 쓰려고 하면, 결국 해당 신앙을 망친다. 다른 용어로 쓸 수 있는데, 선점한 것이다.
한국 시장주의의 왜곡에는 ‘농민유전자’에 기인한 가족주의 정서로 불신이 깔려 있다. 보수가 국가가 아니란 것도 쌩뚱맞다. 자유경제원 김정호씨의 이념은 김대중(박현채)의 대중경제론 위에 지은 논리의 집의 의혹이 대단히 강하다. 원래, 한국인 무의식속에서 반만년 제정일치 농업 군주를 향한 유전자가 있다. 이런 속에서 國家가치를 좌익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결국은 최종적으로 보수에 국가수호의지를 점진적으로 철폐하려는 큰 계획 안의 복종이라는 의혹에 자유롭지 않다.
보수논객의 자기혼자만 느끼는 서구 이론에서 ‘대박’을 느끼는 주술적인 물신 코드를 넘어서서, 지금 당장 한국에 필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 엘리트부터 말단까지 가족주의 유전자로 팽팽한 공간을 어떻게 협력질서로 바꾸느냐에 있다. 가족주의 유전자가 많았기에, 시장 사회에서 신뢰가 적었고, 신뢰가 적은 공간을 뚫기 위해서 國家가 비대해지는 악순환이 있다. 보수논객은 시민사회에서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윤리로서 사람관계를 만드는 고민은커녕, 국가의 보충기능만 두들기기 쉬웠다. 이는 다시 말해서, 제각각 노는 가족사회속에서 강자로서 대기업의 횡보를 편드는 속내가 있었다는 말도 된다.
까놓고 말하자. 강성노조나 공무원 노조가 칼 폴라니를 읽고 그 짓하겠나? 보수 논객이 ‘자기 황홀’에 갇혀서, 보수 전체의 방향착오를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한정석씨가 ‘老子’를 自由로 쓰는 데에서 반문했다. 어느 덧 페이스북에서 서로 안 보는 사이가 된 것 같다. 老子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현대사에서 중국 공산당사에서 영향을 받은 ‘공산당 역사’와 상관이 있다. 서구 이론을 아는 자신이 세상을 어엿비 여길 차원으로만 알지, 정작 한국현대사속에서 이념 전쟁 폭은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서를 보면, 일정 부분은 성경적이고 일정 부분은 성경적이지 않은 측면. 특히, 弱者를 위한 성경적 책임윤리를 드러내는 부분이 많다. 한정석씨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부분을 모른다. 이런 부분에 잘못 전달하는 것에 안타까움이 없다.
그냥 부탁한다. 보수논객들에게.
교횟말은 기독교적 토대가 없이 진영논리적으로 쓰지 말자. 부탁이다!! 오히려, 거꾸로 교횟말을 쓰려면, 신앙적 겸손이 우러나는 표현을 제시함을 보여야 한다.
사물화된 인간은 짐승처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는다. 그건 自由일까? 소국과민 사회에서 찾는 우민화로서 道가, 산업사회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기껏, 도교적인 물질 욕망을 충족시키는 非 기독교자본주의는 일본식 체제로 해야 하는데, 그런 차원은 무한히 수천만가지 종족신을 인정하는 분열주의 전략으로, 일본 천황 남기고 조각내는 식으로 작동된다. 일본식 非기독교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는 老子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체제로는 한국은 작동될 수 없다. 북한 때문이다. 이런 체제에서 폭동 선동이 얼마나 누워서 떡먹기로 쉬운가?
사실, 기독교인중의 적지 않은 숫자는 선데이크리스챤이다. 신앙의 기본서적도 안 읽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가 바라보는 분들은 신앙적 진실을 왜곡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타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시장경제원칙의 토대가 된다.
시장은 갑돌이와 을순이의 협력 속에서 드러난다. 신뢰가 없고 연합이 없다면, 시장은 없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시장은 엘리트가 이끌어온 차원이다. 앞으로는 그런 방식의 담론은 굴러가기 어렵다. 그런 연합이 있는 속에서 교회연합 전제의 시민계급도 존재가 가능하다.
(3줄 요약)
1) 교횟말은 정치의 진영논리로 쓰지 말자.
2) 교횟말을 쓰려면 신앙적으로 쓰거나, 인정된 보편논리를 쓰자
3) 反기독교, 혹은 무신적 지향을 의도하면서도, 교횟말을 언론인적 감각으로 선점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