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문화헤게모니를 깨는 무기는 ‘회개’와 ‘반성’을 통한 ‘인식적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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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마취된 좀비 대중이 되지 않고, 올올하게 깨어있는 영혼으로서 산다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그람시의 ‘진지전’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분이 이토록 文化의 좌경화를 내버려 둔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람시가 그렇다. 유럽의 후진사회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엘리트가 문화를 바꾸어서 대중의 혁명적 의식을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익의 ‘진지전’을 깨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이처럼 어이없는 ‘한숨’ 짓는 말로 표현한다.
문화는 사람의 육체를 포획한다. 좌파 문화를 엎어 뜨리는 길은 2가지다. 권위주의 정권식 규제 방법이 하나면, 문화 내부에서 좌파 문화가 우위로 가게끔 고정하는 재생산 기제에 포획되지 못하게 하는 적극적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70년대 좌파 진영에서 배울 바가 있다. ‘국가’란 단어가 70년대에 반공세력 우위의 문화정치로 바라보고, 김대중의 정신적 스승 함석헌은 끊임없이 자신의 추종세력에 단절을 요구했다. 그렇게, 우리사회에서 좌파 우위(혹은 좌파가 원하는 상태) 구조를 고정화하는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영웅’주의다.
보수측에 줄 선 할아버지 논객들은 이미 불가능해진 권위주의 처방을 내리면서, ‘영웅’주의라는 좌익 우선주의 문화헤게모니 키워드를 공유하며 반공전선을 벌인다. 냉정한 말로, 류근일씨 자체가 좌파와 싸운 사람에도 속하지만, 좌파 문화의 지속을 보장하는 사람에게도 속한다. 보수진영의 슬픈 현실이지만 보수를 찍어주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의사표현을 삼가는 경향이 강하다. 먹고 살기 바빠서 안하는 경우, 몰라서 안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케이스가 포함돼 있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 과 함께 한 ‘카프’란 문예집단이 천도교 기관지 [개벽]을 통해서 벌어진 것 뿐만 아니라, 해방공간 남북연석회의 직후의 통일전선 움직임에 ‘천도교’(이는 이승만정부로 하여금 38선 이남의 천도교청우당을 해산시키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도 그렇고, 또 70년생인 체험 단위였던 때 좌익 프레임 발전에도 천도교의 ‘영웅주의’를 느낀다.
87-91년 당시 대학가에 유행한 것은 레닌과 주체사상이다. 이게 동학을 근저로 풀렸다고 책은 말한다. 서울대 AIPDR에서 주체사상을 86년에 수입할 때부터 그랬다 한다.
90년대에 유행한 마르크스 이론은 그람시와 알튀세르다. 그람시는 후진 이탈리아 시민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엘리트가 진지전을 통해서 문화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이런 담론을 이어받아서, 이론적 실천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란 담론을 내세웠다.
2000년대의 들뢰즈의 ‘소수자 이론’ 역시 천도교 문화의 작동으로 설명 가능하다. 알튀세르 때부터 알음알음 퍼져온 ‘라깡 심리’에 기초하여, 전 지구적 혁명이론을 내세우는 것인데, 그 배경 심리는 역시 동일하다.
문화는 진영담론을 넘어선다. 상대 쪽 사람들에 문화가 지속되게 체념하고 동의하는 구조가 형성돼야, 문화 권력이 강고해진다. 그람시는 지배문화로 자본주의 문화가 노동자에게 그런 효과를 주입한다고 하여 혁명적인 유기적 지식인이 그것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좌파 문화가 우위로 되기 위해서, 지금 그런 차원으로 운동권 문화 우위구조가 심겨지고 있다.
김현과 조현아가 비슷한 구조면서, 김현은 끝까지 보호되는데 조현아가 개털림 당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문화에서 甲질 내부의 甲乙관계를 보여준다. 동시에, 진보 문화에 옹호적인 JTBC에서 무속인이 된 탤런트 정호근씨 관련 문화를 줄기차게 홍보하는 것에서도 무엇인가 어떤 기제를 보여준다.
최근 방송은 ‘영웅’과 ‘힐링’을 줄기차게 말한다. 그것은 서사무가에서 영웅과 굿의 해원풀이의 표현 바꾸기였다. 좌익진영은 통일전선 담론에서 천도교종교를 종교정치로 활용했다. 文化는 그냥 문화가 아니라, 정치에 깊이 개입하는 차원이다.
나는 조갑제기자의 ‘징기스칸’담론은 이런 좌파 문화 헤게모니를 고정해주면서(내면 구조), 좌파와 싸우는 외형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진작부터 지적했었다.
그러나,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역사책의 기록에서 천도교 구파가 소수파요 대한민국에 줄 섰고, 천도교 신파가 다수파요 종북진영에 줄 섰다는 표현을 실감나게 한다. 즉, 보수와 진보, 모두를 장악한 게 지금은 ‘천도교’가 아니냐 하고 의문한다. 최근 10년 넘게 그토록 좌익과 싸우면서도 좌익 문화를 깨뜨리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보수 논객을 보호해주는 보수정당이나 보수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게 사실상 드는 의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진영론을 넘어서서 심리적 요인, 문화구조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류근일씨가 선호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서 좌파 문화 헤게모니 보호에, 좌익과 가장 많이 싸운분들일수록 정확히 걸린다.
사실, 무장항쟁사에서 무속신앙 계열 종교가 지배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사회적 데모를 위한 동원담론에는 무속신앙 기복주의 코드가 먹힌다.(그런 연유로 보수 안에 천도교계열 종교 정치를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앞일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좌파 문화 헤게모니를 깨는 데에는, 무속신앙 계열 종교로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에게 좌파 문화 헤게모니를 깨는 가장 바른 길은, 성경적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부가 무속신앙과 타협하는 기독교를 요구해도(유명한 목회자가 정부의 통일 담론과 연관해서, 정통신학을 훼손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한다), 그것을 따르길 당당히 거부해야 한다.
한국인의 무의식은 후진사회의 수동성이 강하다. 그런 연유로 이미 포획된 상태에서 나오게 할 때는 엘리트의 모범을 보이는 사례가 중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평에서는 각자의 책임의식을 존중하는 기제를 써야 한다. 지금 류근일씨 칼럼은 좌파에 장악된 문화에 있어서 대중에 나오는 법을 말하지 않고, 또 미래에도 각자의 책임의식을 넣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가 규제해서 자신들을 포함한 쪽에 궁물을 달라는 속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단 한 개의 액션도 취하지 않고, 책임전가만 하는 글을 읽기 지겹다.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유행한 좌파담론인 주체사상-레닌-알튀세르-그람시-들뢰즈, 그리고, 20년대 카프에서 남북연석회의까지
아울러, 이번 김기종 사태에서 仙 관련 종교를 연상시키는 개량한복까지. 이런 분위기와 온 세상의 ‘영웅’타령과 ‘힐링’타령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를 깨는 무기는 바로 ‘회개’다. 자기가 변하면 좌파가 무너진다. 특히, 류근일씨 같은 분이 사고체계가 달라지면 좌파가 무너진다. 같은 사고구조로 보수를 하고 진보와 분리하되, 보수의 문화가 폭이 더 작으면 좌파 문화 헤게모니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